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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석 Oct 15. 2021

사형수

Cheesecake Vol.1 - Winter

  뒤에는 악마가 있고 앞에는 깊고 푸른 바다가 있다고 생각해봐요. 혹자는 그게 삶이라 하더군요. 총성이 울리면 우리는 악마에게 끌려가는 걸까요? 아니면 깊이를 모르는 찬 물 속으로 잠기는 걸까요?    

 

온정민, 추워요 中     




  ”9936!”     


  확성기에서 익숙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호명된 번호를 가슴팍에 달고 있는 사람들은 이내 줄을 선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을 한 사람도 있고, 불안감에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사람도 있고,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계단을 오른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가장 가파르면서도, 가장 낮은 계단을.     

  홑겹의 낡고 얼룩진 옷, 깎지 못한 수염, 피폐한 몰골, 붉은 번호표.     


  이곳은 사형장이다.    



 

  콜로세움 같은 거대한 원형 구조물. 높은 돌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기다란 행렬. 호명을 받은 9936들이 올라가고 있는 계단 끝에는 금속제로 된 육중한 문이 있다. 문 바로 옆에는 다른 철문이 있고, 내려오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다. 계단의 끝까지 오른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가고, 대개는 10초 정도 후에 나온다. 급하게 나오는 사람은 5초 정도 걸리기도 하지만, 천천히 나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보통은 10초 안에 다른 문이 열리지 않은 채, 다음 사람이 들어간다.     

 

  빠져나오는 시간 동안 느끼는 것은 다른 것 같았다. 누군가는 온몸이 바늘로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가면서 나왔다고 했다. 보통은 이런 좋지 않은 경험을 하는 듯하지만, 따스한 바람을 맞기도 하고, 좋은 노래를 듣거나 꽃향기를 맡고 나오는 때도 있었다. 어떤 기준으로 변하는지도, 어떤 주기로 변하는지도 분명하지는 않으며, 심지어는 한 번 들어가서 여러 경험을 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일이 언제부터 반복되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였을지도. 표정을 보면 대부분은 이런 상황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거나, 이런 반복적인 행위를 달관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관찰한 결과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개 10초보다 천천히 나오는 편이었다. 기억하기로는 이 사람들은 정말로 위험하거나, 정말로 온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간혹 서로 대화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서로에게 말을 걸거나 간섭하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모두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서로 꺼리는 것뿐 서로의 접촉을 막지는 않기 때문에, 종종 소란이 생기기도 한다.      




  ”씨발, 총 이리 내!“     


  한 켠에서 소란이 일었다. 17000번 즈음의 구역에서 무언가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사람이 많아 잘 보이진 않지만, 들리는 말로 보아선 다른 간수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 같았다. 다른 죄수들은 그저 지켜만 볼 뿐 간섭하지 않았다. 간수들도 익숙하다는 듯 형식적인 제지만 하고 있을 뿐, 적극적으로 제압하려 하진 않는다.     

  기어이 그 사내는 간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뺏어 들었다. 이내 숨을 몰아쉬더니, 서서히 관자놀이에 총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철컥,     


  공허하지만 분명한 금속제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내가 황급히 약실을 살펴보았다. 약실은 비어 있었다. 이내 그 사내의 눈이 죽어버리더니,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소란을 일으킨 17381, 오늘은 당신의 차례가 아닙니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시오."     


  확성기에서 나오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너머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린다. 언뜻 둔탁한 타격음도 들렸던 것 같다. 주저앉은 사내가 부들부들 떨린다.      


  “9937!”     


  소란이 있던 사이 9936의 차례가 끝났다. 행렬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계단을 오르기 전보단 약간 줄었다. 그들은 익숙한 듯 왼쪽 가슴께에 있던 번호표를 떼고, 다른 번호를 받아 부착한다. 아까보다 1 늘어난 9937이다. 내일, 저 사람들은 오늘 이 시간에 다시 계단을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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