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골목을 동네, 마실 가듯
생애 첫 배낭여행 골목길 잔혹사는 그렇게 끝이 났고 이내 추억으로 남았다. 특히나 파리에서 맛 본 ‘어리바리(!)’의 일들은 훈장처럼 뇌리에 박혔다.
이후에도 내가 운이 좋은 건지, 해외 출장복(福)이 따로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1년에 최소 두세 차례 해외 출장의 기회가 주어졌다. 외국어가 능통한 것도 아니고, 국제업무 담당도 아니지만, 나는 문화 스포츠 사업파트에서 일한 탓에 월드컵, 올림픽, 엑스포, 대형 국제 문화행사 등이 우리 사업파트의 영역이었다.
이런 대형 국제 이벤트들은 각기 4년에 한 번씩 돌아오지만 스케줄을 합쳐보면 매년 최소 1~2건의 대형 국제행사가 개최되는 셈이다. 월드컵이든 올림픽이든, 올림픽은 또 하계, 동계로 나뉘지 않은가? 아시안게임도 있고...
특히 나는 유럽행 출장을 많이 가게 되었는데 처음 무뚝뚝하게 다가온 독일은 수차례 더 갔고 프랑스, 영국, 스페인, 터키 등 유럽의 다른 도시들도 수시로 다녀왔다. 전문 여행자도 아닌 이상 매 출장마다 업무 일정 외 좀처럼 나 홀로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결국은 마른 수건 쥐어짜듯 시간을 가혹하게 다룰밖에. 몇 가지 추억을 떠올려본다.
내게 로망의 도시로 바뀐. 파리
인상적이었지만 쓰디쓴 추억의 도시. 파리는 이년만에 또 마주하게 되었다. 스포츠마케팅 국제박람회가 칸느에서 개최되어 일정을 모두 마치고 귀국하기 하루 전 나는 온종일 홀로 파리와 상대하기로 맘먹었다. 시내 관광을 나서는 일행과도 떨어져 나 혼자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센 강변을 따라, 파리 중심부 뒷골목 구석구석을 지도 한 번 보고 몸속 나침판에 의지해가며 오전부터 늦은 저녁 동료들과 합류하기 전까지 온종일 거의 도보로 걸어 다녔다. 중간에 지하철 1코스 잠깐 탔을까? 1년 전 당황하게 만든 파리가 이젠 편하게 느껴졌다. 골목길 구석구석에 도시의 속내음을 맡고 뒷골목 카페에 앉아 차분히 생각하고 여유를 찾으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파리지앤의 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화강국, 파리 시민의 자부심이 보였다.
칸느 강변을 차분히 걷노라니 자연의 풍광을 지키려 한 그들의 노력을 엿보았고 마구잡이 시멘트로 덕지덕지 바른 우리의 한강을 떠올렸었다. 몇 년 전 성수대교 참사를 겪은 그 아픔까지. 연인들의 다리 ‘퐁네프’에서 추억의 명화를 떠올렸고 베르사유 궁전 광장 한편에서 유럽의 문화, 경제강국인 프랑스가 한없이 부러웠다. 화폐 단위마저 ‘프랑’이니 부드럽고 아름답다. 이 년 전 파리의 악몽은 이제 로망으로 바뀌었으니 참 웃길 일이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다.
독일은 수년이 더 지나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대한민국이 주빈국으로 초청)과 월드컵, 하노버 국제 전시회 등 이런저런 국가 프로젝트에 가담하게 되어 자주 가는 주요 출장국이 되었다. 독일도 통일 후 많이 지난 터라 동서 간 사회적 통합과 경제안정이 어느 정도 이루어서 예전보다 나라 전체가 편하게 다가왔다.
독일인의 얼굴에 웃음기가 많아졌다. 독일행(특히 프랑크푸르트) 출장이 잦아지고 체류기간도 길어질 경우가 많아 전보다 중간중간 짬을 낼 수가 있었다. 그래 봐야 도시 영역을 넘어갈 순 없기에 프랑크푸르트 골목을 온전히 접수하겠다는(?) 각오 아래 도보 순례 계획을 차근히 실행했다.
중앙역 근처 거리부터 시내 중심부 거리, 골목을 훑고 구도심 중심지 뢰머광장부터 한적한 마인강변을 따라 시인 괴테 생가에 이르는 코스는 익숙한 산책코스가 되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는 빈 도화지에 시내 골목골목을 세세히 스케치할 정도가 되었다는. 누구나 소박하게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마인강변을 따라 한두 시간 걸어보라. 맘 속에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 사유하는 철학자가 될 것이다. 사람이 진짜 사뭇 진지해진다.
휴일에는 동료들과 근거리 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다.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 라인강변을 따라 로렐라이 언덕을 지나 뤼데스하임 참새 골목까지. 참새 골목은 딱 우리네 대학가 언덕 뒷골목을 닮았다. 그냥 걷고 지나치기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당연히 나도 이 유서 깊은 골목에서 깊고 진한 독일 흑맥주를 여러 잔 당겼다.
어떤 때는 기차를 타고 두 시간쯤 홀로 고즈넉한 로만 가도에 있는 마인츠까지 다녀오기도 하고 한적한 교외 농촌지역을 자연과 벗 삼아 산책하며 와인 농장 주인 할아버지가 건넨 달콤한 와인맛에 반했던 추억을 기억한다.
독일에서 대형 행사를 치르는 데는 현지 교민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는데 프로젝트마다 그들의 도움이 컸다. 물론 예외의 경우가 있었지만, 독일에서 만난 우리 교민들은 수십 년 그들의 고달픈 인생사를 전해주며 함께 공감했다. 광부, 간호사로 이국땅에 온 지 4~50년 가까이 된 세월이기에, 타국에서 태어난 2세, 3세들도 서투른 우리말에 미안해하며 점점 발전하고 커가는 고국의 위상을 자랑스러워했다.
독일 월드컵에는 현지 교민들과 응원 행사를 대대적으로 사전 기획, 준비했었다. 당시에는 우리 딴엔 극비 프로젝트라 주변에 알리지도 않고 나는 단출하게 파트너와 독일로 급히 날아가 독일 교민회 전체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 내 우리가 단독으로 행사를 치르는 실마리를 풀었다. 크리스마스 즈음 겨울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까지 기차로 달려가 성과를 이룬 후 베를린 광장 거리를 눈 내리는 추운 날씨에도 두어 시간 걸었다.
기차 출발시간이 남기도 했고 언제 다시 겨울 베를린 거리, 골목을 걸어보겠는가? 하는 욕심이 앞섰다. 만감이 교차했다. 향후 이 프로젝트를 오롯이 성공시킬 수 있을까? 앞날이 걱정도 됐지만 그날 걷는 내내 뿌듯했다.
통일 독일의 상징. 브란 텐 부르크 문. 바벨 광장, 독일 의사당 등 베를린 한복판의 중앙대로를 걸으며 나는 조국. 대한민국을 떠올렸다. 왜 외국에 나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더욱이 나는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우리 대한민국을 응원하는 해외 프로젝트를 맡은 메인 담당자가 아닌가?
런던 펍(PUP)에서 대한민국을 외치다~ ‘대한민국~ 짝짝 짝짝짝!’
런던은 이제 짐작이 가겠지만 십여 년 전 2012 런던 올림픽 때 한 달 가까이 체류했다. 런던 시내 중심부에 우리 국가대표팀 지원센터 겸 한국 홍보관인 ‘코리아 하우스’ 운영 프로젝트였는데 역시나 런던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업무 외적으로는 나의 골목길 탐험 대상이었다. 당시 숙소와 한국 메인센터의 거리는 버스, 택스로 10~15분 안짝, 도보로는 근 지름길 골목길을 거쳐 사오십분 남짓했다. 급한 일정이 아니면 나는 동료 스태프들과 따로 홀로 걸어서 출근했다.
거리 중간에 그 유명한 공원. 하이드파크를 거치게 되어 출근 도보길은 더 없는 건강하고 유쾌한 산책시간이자 복잡한 서울시내에서 느낄 수 없는 사색의 시간이었다. 일찍 일과를 마친 오후엔 헤롯백화점 거리를 지나며 값비싼 명품을 눈으로 감상하기도 하고, 대영박물관 거리에 있는 온갖 박물관을 두루 섭렵하는 내내 그동안 다진 걷는 힘! 두 다리의 그간 노고를 위로했다.
센 강, 라인강, 마인강변과 마찬가지로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즈강변 산책코스는 빼놓을 수 없는 경관을 자랑한다. 대형 전망대 런던아이, 국회의사당, 시계탑으로 유명한 빅벤, 타워브리지와 함께 이른 아침 또는 저녁 야경을 감상하며 걷는 시간은 매우 클래식하고 짜릿한 흥분을 주었다.
하이드파크 공원 한 편에는 대형 야외공연장이 세워졌는데 올림픽 기간 중 영국의 인기 아티스트들이 총출동하는 콘서트가 매일 범 열렸다. 아쉬운 건 티켓이 이미 전회 매진된 상태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콘서트장 밖으로 모든 관객이 ‘Hey Jude~’를 외치며 뗴창을 부른 함성에 소름이 오싹 돋기도 했다, 전설적인 스타 비틀스 ‘폴 메카트니’의 무대였던가 보다.
올림픽기간중 우리 한국 대표팀이 좋은 성과를 내는 날엔 일과 후 스탭끼리 모여 조촐하게 런던 시내의 펍(PUP) 거리에서 우리끼리 자축하며 환호했고 바로 옆 현지인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도 같이 즐겼다. 우리가 근무복처럼 입고 다닌 ‘코리아팀’ 유니폼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 말이다. 펜싱 금, 양궁 금, 연일 한국 대표팀의 금메달 소식에 현지 스태프들은 매일 환호를 외쳤다. 역시 정점은 한일전 승리 후 축구 동메달이었다.
런던의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피카딜리 서커스 거리부터 코벤트 카든. 때론 버킹검 궁전 거리까지. 어느 날엔 전철 타고 노팅힐로 달려가 영화 ‘노팅힐’의 유명 서점을 둘러보고 영국의 서민적인 노팅힐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혼자 ‘She~~’ 영화 주제 가곡을 읊조리며 활보하기도 했다. 이 또한 나만의 방법으로 도보 낭만을 즐기는 호사였다.
이스탄불 전통시장 ‘그랜드 바자르’에서 ‘강남스타일’을 부르다
동서양이 만나는 문화의 도시. 터키 이스탄불은 한국-터키 문화교류 프로젝트 준비로 2주 정도 체류한 적이 있다. 한국의 전통행사와 터키의 전통문화가 어울리는 만큼 출장 전에 꽤 많이 사전 공부를 하고 터난 터키였다.
박물관으로 유명한 아야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 이슬람 사원, 톱카프 궁전이 있는 이스탄불 구도심은 모든 관광객이 필수로 들리는 유서 깊은 지역이다. 하루는 아이야 소피아 성당 관람을 한 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정원 벤치에서 명상에 잠기다 잠깐 눈을 떠보니 멋지게 생긴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옆에 앉아있어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러다 잠시 후 ‘신기하네 그놈. 참!’ 나는 이 고양이에게 곧 반해 버렸다.
내 눈과 마주친 고양이는 태연하게 그냥 나를 힐끗 바라보다 이내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로 잡고 정면을 두루 살피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의연하고 멋스러웠다. 역사 깊은 장소에서 사는 고양이라 그런가? 수백만명의 세계인들이 찾는 이곳에서 이렇게 품위 있고 점잖은 고양이 신사를 만나다니... 이 고양이가 내가 한국인이라 그런가? 하고 혼자 즐기며 웃었다.
내가 묵던 호텔은 아이야 소피아 성당 바로 인근에 있어 전통 있는 이 거리는 체류기간 내내 매일 지나치는 필수 코스였다.
운치 있는 이 거리에서 천년고도 이스탄불의 문화와 역사를 만끽하고 동서양이 만나는 절묘함을 느꼈다. 호텔에서 출발해 아야 소피아, 구도심 거리, 콘스탄티노플 항구, 갈라타 다리, 탁심광장에 이르는 약 2시간 정도의 도보 코스는 자주 찾는 거리였다. 이스탄불의 매력을 흠뻑 느껴가며 갈라타 항구의 유명한 ‘고등어 케밥’을 먹으며 묘한 맛에 빠졌다.
아마도 이 코스는 2주간의 출장기간 중에 적어도 네다섯 차례 이상을 걸은 걸로 기억한다.
이스탄불의 최대 전통시장 ‘그랜드 바자르’는 6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최고의 관광명소인데 워낙 깊고 넓어서 미로 같은 시상 골목에서 누구나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이다. 시장 구경하는 재미로 여러 차례 들려 이스탄불 시민들의 최애 음료인 달디 단 ‘홍차’도 마실 겸 기념품도 살 겸 이 시장은 절말 재미있고 정감이 넘치는 곳이다.
당시는 싸이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를 강타할 때였다. 시장 골목을 지나치다 상인들이 나를 보면 대부분 ‘꼬래?(KOREA)’ 하고 인사 신호를 하며 미소 짓는다. 어떤 이는 한술 떠더 ‘오빤~ 강남 스타일!’하고 말춤 시늉을 한다. 나도 기꺼이 말춤을 추며 장단을 맞춘다.
오빤 ~ 강남스타일~!‘ / 아이 러브 이스탄불~
이스탄불 시민들은 유독 우리 한국인에게 매우 친절하고 상냥했다. 형제의 나라, 코리아를 대부분 인식하고 2002 월드컵 3~4위전에서 맞붙은 한국-터키. 관중석에서 우리 붉은 악마가 올린 대형 터키 국기의 감동을 모두들 기억했다. 정말 터키인들은 우리 한국을 정말 좋아했다. 유럽과 세계의 많은 도시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뿌듯한 도시는 드물다.
세계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역시나 깊이가 있고 울림이 있다. 굳이 세계적 관광도시가 아니라 그 도시의 오랜 역사를 간직하며, 시민과 함께 이젠 세계에서 오는 방문객들을 맞으며 같이 공감한다. 물론, 이 들 도시도 환경의 변화, 도시의 팽창 속에 구도심외에 신도시, 개발지구가 속속 나타나고 있지만 그래도 이들은 꼭 지킬 것은 지켜내는 사람들이다. 조금 불편해도 오랜 역사가 벤 구도심 거리와 골목을 오롯이 보존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들은 도심 재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하루가 멀다 하고 원도심, 골목이 곳곳에서 파헤쳐 저 사라지고 있다. 좁고 굽어졌지만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골목 대신 뻥 뚫린 대로와 높다란 고층빌딩이 이를 대체하고 있음이 아쉬울 따름이다.
돌이켜보니 이국의 골목을 참 원 없아 걸었다.
■ 황홀한 골목을 위.하.여 -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