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골목에서 환희와 절망을 맛보다!
골목길 산책은 여러모로 나를 들뜨게 한다. 특히나 처음 찾는 동네, 낯선 마을의 거리, 골목을 걷노라면 호기심과 설레임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하물며 이역만리 외국의 거리야 두말할 나위 없다.
추억해 보건대, 나의 생애 첫 해외여행은 90년대 중반. 직장 2년 차 시절에야 이루어졌다. 당시 업계에서 잘 나가던 회사가 사원 ‘크리에이티브 트레이닝’이란 목적으로 1주일 내외 해외 배낭여행 지원(인당 200만 원 한도)’이라는 파격적인 특별휴가가 주어졌다. 지금 물가로 환산하면 어림잡아 인당 3~4백만 원에 해당하는 특혜였다. `선배 직원들과 갓 입사한 새내기 후배들이 모두 우리를 부러워했다. ‘신의 축복을 받은 연차(기수)라고...’
이제 온 국민의 해외여행은 흔한 일상이 되었지만. 당시는 자유 배낭여행이 막 붐을 타는 초창기여서 연간 해외 여행자 수는 400만 명을 조금 웃돌까 싶을 정도였다. 코로나 이전 2019년 연간 출국자수가 2,900만 명(!) 정도라 하니 요즘의 15%가 채 안 되는 수치였다. 김포공항 국제선은 그래서 대체로 한산한 편이었다.
유학파도 아닌 토종 국내파인 내 첫 해외여행의 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친한 동기들과 함께 의기투합, 셋이서 팀을 꾸렸다. 모두 다 첫 해외여행이었으니 근 2~3주일간의 준비기간은 행복한 설레임의 시간이었다.
행선지는 유럽. 그것도 독일-프랑스-스페인이라는 1주일 강행군 코스를 설계했다. 미친 거 아니야?라는 부러움 섞인 비판을 받았지만 무슨 개척자라도 된 양 당당하게 우리의 계획을 밀어붙였고 김포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편도 대한항공이 아닌 루프트한자로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갸륵하고 유치하다.
무뚝뚝한 프랑크푸르트 골목
난생처음 타국의 경험을 안긴 프랑크푸르트 시내 거리는 아주 낯설고 살짝 두려움마저 감돌았다. 몸집이 대체로 크고 무뚝뚝한 표정의 독일인들에게 동양의 이방인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는지 경계의 기운이 가득했다. 통일 후 10여 년 정도 지난 터라 아직 경제적으로 불안해서 그런가? 알고 보니 독일인 특유의 무표정에서 오인한 오해였지만. 당시 우리의 관심사에 독일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냥 거쳐가는 도시라 생각할 뿐. 하필 술 취한 노숙자가 우리한테 알아들을 수도 없는 독일말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우린 기분도 쾡해졌다. 그에게도 동양 이방인들이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딱 하루 머물던 프랑크푸르트에선 휑한 골목, 한 편의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세트 딸랑 하나 먹은 기억밖에 없다. 우린 그날 밤기차로 급히 일정을 바꿔 파리행을 선택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우리에겐 ‘시간이 금’이었으므로 차라리 낭만과 로망의 도시. 파리를 하루 더 경험하자는 것이었다.
우아하게 다가온 파리, 그리고
밤기차(침대칸)로 7~8시간을 달려 동틀 녘 도착한 파리는 독특한 풍광과 함께 다가왔다. 너무 이른 아침이어서 문을 연 식당, 카페가 아직 없어 기차역 근처 오래된 프랑스식 전통정원에서 머무르며 시간을 때우기로 했다. 정원의 정갈함, 우아함을 만끽하고 마치 영화 주인공인 된 것처럼, 광고쟁이 아니랄까 봐 CF 찍듯 온갖 포즈 잡고 서로 사진 찍어주느라 분주했다.
파리 뒷골목의 아침 녘 풍경은 이채로웠다. 몸집 크고 무표정한 독일인과는 달리 우리네처럼 풍채도 아담하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지나치는 파리 시민들은 모두 근사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이들을 ‘파리지앵’이라 하나? 골목 어귀에 문을 연 노천카페에서 난생처음 주문했던 고급진 이름의 에스프레소 커피는 곧 무지의 실수임을 깨달케했다.
“이게 무슨 커피야? 한약이지.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담? 쯧쯧”
쓰디쓴 커피맛을 억지로 참아가며 마셨던 웃지 못할 추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쓰디쓴 에스프레소의 맛을 알며 가끔은 즐기기까지 한다.
개선문, 샹젤리제 거리를 거쳐 우린 2~3일 동안 파리 시내 웬만한 곳은 도보로 쏘다녔다. 하나라도 더 골목, 시장, 광장을 더 많이 둘러보기 위해 치열하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에펠탑도 올라가 보고, 센강 유람선도 티보고, 파리의 이층 버스, 지하철도 경험하고 분주한 나날이었다.
그뿐인가? 몽마르트르 언덕과 성당, 거리의 미술가들을 접하면서 문화와 예술의 도시 파리를 만끽하고 감상했다. 여기서도 우리의 어설픈 골목 해프닝은 이어졌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던 차에 어디서 시원한 맥주 한잔할까? 하다 거리에서 우리를 보고 친절하게 이끌던 잘생긴 청년의 안내로 들어간 곳은 조금 소박한 카페였는데 그야먈로 삐리 삐리 한 동양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악질 가게였다.
메뉴표에 가격이 안 쓰여있길래 “한 병쯤이야~ 얼마나 하겠어?” 하고 마신 맥주 한 병이 무려 330프랑!!! (당시 1프랑이 150원쯤 됐나?)이니 우리 돈으로 대략 오만 원 남짓했다. “세상에~! 맥주 한 병에 오만 원 돈이라니?”
헛참 우리가 짧은 영어로 아무리 항의해도 그들의 태연하게 나몰라라 하는 불어 대답은 도무지 당해낼 수 없었다. 어줍지 않게 ‘삐끼’에게 당한 우리의 허술함, 어리석음이 내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도착 첫날, 우아하게 다가왔던 파리가 이때부터 미워지기 시작했다. 관광 볼거리가 많아 좋았는데 고생길이 열렸다.
그날 묵은 저렴한 골목 끝 호텔방은 차라리 우리 예전 ‘여인숙급’ 만도 못했다. 온수도 제대로 안 나오고 서비스가 엉망이었다. 파리의 불운은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스페인을 다녀온 후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마지막 날 다시 들어온 파리는 우리에게 크나큰 절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날 출국 예정일엔 오전 9시 드골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하는 한국행 티켓이 예약되어 있어(비행기 값 아끼려고 환불, 스케줄 변경이 안 되는 비행 편) 우리는 유럽 배낭여행 마지막 날의 멋진 추억을 만들고자 파리 한 기차역 무인 짐 코너에 트렁크를 각자 맡기고 간편한 차림으로 파리의 오후와 멋들어진 야경을 감상했다. 저녁 8시 조금 지났을까? 짐을 찾아 시내 중심부에서 거리가 좀 떨어진 호텔에 가려 도착한 기차역에서 우리는 크게 탄식해야 했다. ‘아뿔싸!’
기차역 짐 코너는 알고 보니 24시간 운영이 아닌 오후 6시 Close였다. 급한 마음에 불어로 쓰인 안내문에 시간 제약이 있는 걸 체크하지 못한 탓이었다. 짐을 찾으려면 다음 날 오전 8시가 돼야 했고, 1시간 이상 떨어진 드골공항의 예약 비행기는 9시니 도저히 탑승 불가능이었다. 기차역 야간 경비원에게 아무리 손짓, 발짓 애원해가며 설명해도 그의 대답은 단호히 ‘NO’였다.
책임과 약속, 규칙을 우선시하는 그들에게 낯선 동양인 청년들의 하소연은 ‘내 알바?’ 식이었다. 상의 끝에 현지 대사관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직 대사관 직원의 반응도 싸늘했다.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여행자의 실수까지 일일이 응대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울분이 끓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됐냐고? 너무도 기막히고 코가 막힌 배낭여행의 마지막 대참사이기에 그래도 우리에게 즐겁고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게 해 준 스페인 골목 여행담을 먼저 떠올려 본다.
파리 시내의 기차역에서 난생처음 신칸센(일본), ICE(독일)와 함께 당시 세계 3대 고속철도라 불린 ‘테제베(TGV)’를 타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 인근의 종착역까지 시속 200km, 내리 5시간이 넘는 기차여행에 이어 스페인 국내 기차로 환승. 또 내리 8시간을 달려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했다.
열정과 낭만의 골목을 걷다, 마드리드
차장 밖으로 보이는 프랑스, 스페인의 이국적인 아름다운 풍광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에 푸르른 하늘, 곳곳에 보이는 대단위 포도밭, 낭만적인 유럽 시골마을의 멋진 경치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기차 식당칸에서 맛 본 맛있는 피자와 독특한 향미의 맥주 맛이 일품이었다. 우린 모두 신이 났다. ‘와~ 좋다, 원더풀, 뷰티풀~!’
마드리드 시내의 골목은 프랑크푸르트, 파리와는 또 전혀 다른 풍취가 느껴졌다. 마드리드에 마주한 스페인인들도 비교적 아담했지만 그들의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이 드러나듯 대부분 우리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환한 미소와 호쾌한 웃음소리가 우리에게 ‘그라시아스~!! 땡큐! “를 연발하게 했다.
골목길을 걷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했다.
고풍스럽고 멋드러진 마드리드 시내를 걸으며, 유명한 광장 한 복판에서 한 시대 무적함대로 세계를 호령하던 스페인의 영광을 느낄 수 있었다. 상점, 점포 문을 닫고 오후 두어 시간 낮잠시간 ’ 씨에스타‘를 즐기는 그들의 여유와 호탕함에 놀라기도 했다. 이 바쁜 세상에 어찌 이리 한가할 수가? 먹고 사느라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문화이다. 돈키호테, 플라멩코, 투우의 나라 스페인은 여러모로 기분 좋은 추억과 무궁무진한 골목여행의 묘미를 선사했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마드리드에서도 우연히 마주친 한 이쁘고 착한 스페인 소녀에게 반하고 감동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마드리드의 한 역사 깊은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던 참에 거리가 너무 멋져 우린 마침 지나던 소녀에계 사진 촬영을 부탁했고 그녀는 흔쾌히 미소 짓고 우리가 건넨 카메라를 받아 촬영 준비를 했다. 그 순간, 빠르게 달려가며 지나치던 두세 명의 스페인 청년들이 늑달같이 소녀의 어깨에 살짝 걸친 가방을 낚아채고 튄 것이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우리 모두 눈뜨고 당한 셈이었다. 정황 없이 뭐야? 하는 사이 이미 날강도, 소년 일당은 이미 저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소녀도 이내 당황하며 살짝 눈시울까지 붉어졌다.
소녀의 가방에 귀중품이나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데, 참 난감한 일이었다. 우린 소녀에게 어쩔 바를 모르고 ’Sorry, Sorry’를 외치며 사과하고 배상을 해 줄 요량으로 ‘How much, Bag? We will pay~!’하고 어설픈 콩글리쉬로 달랬지만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No, no~’ 짤막하게 답할 뿐. 이내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한산한 시간이라 지나치는 행인도 거의 없고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도움을 요청할 경찰이나 경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도 넋을 잃고 한동안 맥없이 거리의 벤치에 앉아 애꿎은 담배만 연신 피워댔다. 소녀에게 한 없이 미안하고 또 한 없이 고마웠다. 어찌 연락 주소라도 알려줬으면 나중애 어떻게 해서라도 답례인사를 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소녀는 극구 사양했다. 25년 전의 까마득한 일인데, 아직도 그날 오후 3시의 아쉬움이 가슴에 짠하다.
고맙고, 아름답고, 생기 넘치던 스페인의 거리, 골목의 추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이제 우리의 마지막 대참사 후기를 떠올려 본다.
첫 배낭여행의 흑역사를 오롯이 간직하다
예약 변경 불가능한 비행기 티켓 3매, 우리 일행이 모두 이 비행기를 포기하면 새로 우리가 생돈으로 다시 비행기표를 사야 한다. 게다가 급구 매라 더욱 비싸다. 이렇게 되면 우린 사실상 개인적으로 상당한 비용을 치러야 했다. 한 달치 월급을 꼬박 물어야 했다. 중지를 모은 끝에 나 홀로 맨몸으로 프랑크푸트트에 먼저 가고 친구 둘이서 가방을 찾아 경유지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혼자서는 트렁크 3~4개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다.
내가 먼저 맨몸으로 도착한 프랑크푸르트 공항 내 환승 공간. 몇 시간을 홀로 벤치에서 시간을 보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니 아무런 대안 없는 고독하고 어두컴컴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에어프랑스 파리발 프랑크푸르트 도착 시간은 알고 있으니 그저 할 일없이 거대한 유리 창밖으로 보이는 활주로만 계속 쳐다봤다. 뜨고 내리는 많은 비행기를 보면서 나는 한없이 상념에 빠졌더랬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그래도 평소 개똥철학처럼 ‘시간이 해결해 준다,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 수도 없이 머릿속에 읊조림 했다.
예정된 비행 편이 도착하고 곧 익숙한 얼굴들이 가방을 끌어오며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췌한 얼굴에 이틀째 면도도 안 한 거뭇거뭇한, 누가 봐도 준(準) 난민의 행색이었지만 명확이 내 친구들이었다. 호기롭게 출발한 첫 해외 배낭여행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꿈같은 여정 속에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금은 옛 추억으로 남은 타국에서 겪은 우리들만이 간직한 이야기들이다.
사회생활 초짜 생애 첫 배낭여행의 애환은 이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후 공교롭게 나는 파리, 니스, 런던, 암스텔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하노버, 이스탄불 등 유럽행 업무 출장의 기회가 많아 이젠 특히나 유럽의 거리, 골목 등은 많이 친숙해졌다.
그래도 오래전 좌중우돌 이국에서 만난 그 날설움 그 짜릿한 갖가지 일들은 아마도 언제까지나 생생할 듯하다. 이국의 골목에서 인생 한 컷을 찍으며 더 없는 삶의 공부를 배웠다.
■ 황홀한 골목을 위.하.여 -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