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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May 19. 2022

검증되지 않은 사람

work log no.11

5월이 무르익고 있다. 여름은 매일 성큼성큼 다가온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작가님이 이제 곧 합류할 예정이다. 이직하자마자 진행했던 작품이니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야 겨우 출발선상에 선 기분이다.


이 작품을 가지고 많은 만남들이 있었고 엇갈림도 있었다. 거절하는 것도, 거절당하는 것도 모두 그렇게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별로 중요치 않은 감정에 불과하다. 특히 거절당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은 각자 맞는 자리를 찾아간다. 나침반의 N극이 북극을 가리키듯.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순리대로.


일이 더 진행된 후의 감상은 또 달라지겠지만 작가를 구하기까지의 네 달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그 어떤 것도 계획대로 된 것은 없다는 점이 놀랍다. 긴 시간을 내서 검토했던 작품들 중에 눈여겨본 작품도 아니었고, 고대했던 비즈미팅 행사에서 미팅했던 작가도 아니었다. 일은 계획대로 진행되지만 결론은 내 통제 밖에 있는 것 같다. 정해진 운명처럼. 재미있는 건 정해진 운명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계획'하고 '성실'히 업무에 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운명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결론을 더 빨리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까지 회의를 품고 끝까지 나를  믿지 않는 사람이 나다. 모든 패를 까 봐야만 보이는 것이 있으며, '버드 아이 뷰'로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한다. 하나하나 결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전체 속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일 진행에 앞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검증되지 않은 사람'과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업계에서는 보통 신인감독이나 신인작가를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내가 판단을 내릴 때도 고민이지만 회사 내부의 설득은 물론 외부 파트너들의 판단까지 영향을 미친다. 아무래도 가장 큰 문제는 제작이 되느냐 마느냐라는 근본적인 판단일 것이다.


전작이 대박 난 크리에이터와 함께 일하기는 여간 쉽지 않다. 돈은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돈이 있어도 안된다. 그들은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 입봉이라는 좁은 문을 넘어 성공이라는 천운까지 거머쥔 자에게는 그때까지 그를 믿어준 사람들에 대한 의리가 있고, 제대로 펼치지 못한 뜻을 펼치고자 하는 고집이 있으며, 더 좋은 조건을 가져와 들이미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그렇다면 그들을 가지지 못한 수많은 제작사와 피디들은 대체 누구와 작업할까? 큰 성공은 하지 않았지만 세상에 자신 만의 작품을 내놓은 크리에이터이거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크리에이터이다. 그중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크리에이터'의 경우 판단할 때 고민에 빠진다. 기업에서 경력이 있는 신입이나 중고 신입을 선호하는 이유와 다소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누군가 먼저 신입 사원을 성장시키는 비용을 지불했길 바라고, 그 증거가 있다면 조금 더 판단이 명료하기 때문에 선호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다 비슷하다.


아니 그럼 신입 사원이 되기 위한 경력은 어디서 쌓으란 말인가? (내 취준생 시절의 외침) 신인 크리에이터는 그럼 어떻게 검증을 받아야 하나? 내가 생각하기에 신인 크리에이터와 일하기 위해서 필요한 마음가짐은 그를 향한 적당한 믿음과 적당한 기대 그리고 프로젝트의 부담을 나눠가지는 것이고, 신인 크리에이터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작품이 작가의 결과 맞는다는 전제 하에 일에 대한 성실함과 의견을 원활히 주고받을 수 있는 소통 능력이다.


대체로 경험치가 있고 기술을 닦아온 기성 크리에이터들이 뛰어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다고 꼭 기성 크리에이터들이 신인 크리에이터들보다 무조건 나은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다. 주어진 데드라인이 있고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가장 베스트가 신인 크리에이터라면 나는 검증의 재판대에 기꺼이 그와 함께 오를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패하면  탓이고,  풀리면 크리에이터 덕분이다. 한때는 이런 말을 불합리하다는 의미로 내뱉곤 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실패하면 나의 판단 미스이고, 일이 잘되면 그만큼  만들어준 크리에이터 덕분이다. 작업은 크리에이터가 했을지언정  크리에이터를 기용한 것은 나니까. 그것이 나의 일이고 실패는 아플지성찰을 남긴다.


결국 이런 시작이 있어야만 내게도 깊은 연을 맺은 인력 풀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작업을 할 사람을 보는 눈과 작업하는 요령을 점점 키워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안과 걱정, 고민의 과정을 넘어서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도전적으로 느껴졌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지 기대가 되었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를 하나의 브랜드라고 생각하고 브랜드 하우스를 그려 보았다. 기업에서 브랜드 전략을 짤 때 활용하는 프레임인데 가장 꼭대기에 있는 것이 정체성이다. (<나답게 일한다는 것>, 최명화 저) 나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은 '재미와 감동을 나누는 것'이다. 그 무엇이 되었든 재미와 감동을 창출하고 공유하는 것을 지향하는 브랜드로써 일단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재미있기를, 때로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불편해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서로에게 감동이 되기를.


그리하여 나는 나의 선택에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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