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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Apr 04. 2022

얼굴들

work log no.7

"그럼 우리 친해질까요?"


누가 작가님 아니랄까 . 드라마 속에서나 나오는 대사를 내가 실제로 듣게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길었던 미팅을 정리하며 아쉬워하는 내게 그녀는 지극히 담백한 일상 언어로 말했지만   한마디로 우리둘러싼 공기가 특별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감각이었나. 사람에게,  사람의 매력에 빠진다는 것은.



3월은 아직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지 않아 쌀쌀했고,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았다. 가족이 코로나에 확진되거나 지인, 업무 파트너들의 확진 소식이 하루가 멀다 하고 도착하곤 했다. 그 무시무시한 역병은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이 내 차례라는 듯 바짝 다가왔다. 그 수치만 보면 마치 쓰나미처럼 전국을 강타하고 휩쓸어가는 형세였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지 나는 무사하다.


나의 2022년 3월은 미팅의 달이었다. 프로젝트를 출항시키기 위한 자본과 승인은 얻었다. 이제 먼바다를 항해하기 위해 사람이 필요한 때였다. '사람'을 데려와야만 하는 미팅에서 아이러니하지만 나는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언가 얻어가야 할 사람이 되면 여유가 없어지고 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미팅을 하고 오면 항상 집에 오는 길이 유쾌하지 않고 씁쓸했다.


내 생각은 그렇다.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리고 결과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드는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매력은 중요하다. 사람에게 매력이 있으면 그저 그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목적이 되어 두 번, 세 번 만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의 일은 서로의 감정을 뒤로한 채 진행할 수 있는 종류의 업무가 아니다. 일의 특성상 아주 밀접한 관계가 되어 밀도 높은 대화를 나누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서로의 최고의 모습은 물론 서로의 밑바닥까지 보게 되는 아주 강도 높은 '감정 노동'의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서 언급한 '감정노동'은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기 시작한 현대 그리고 앞으로 시대에서 인간의 고유한 강점인 고차원적인 노동의 의미로 썼다.)



어쩔 수 없이 비슷비슷한 레퍼토리의 이야기를 하며 대화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사람에 따라 대화의 양상이 아주 많이 달라지는 것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잘 다듬어진 직원 후보자를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구축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그 얼굴들이 더욱 극적이었다고 해야 할까. 듣기보단 아주 먼저 앞서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야기의 방향을 잃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꽂히는 대로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고, 차분하게 경청하는 스타일이라 어떤 개성을 가지고 있는지 더 파고들어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얼굴들을 마주하며 나는 마치 스스로 거울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새로운 사람을 파악하는 동시에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는지를 그 사람을 통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 관심사가 비슷하고,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면 급속도로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대화는 활기를 띤다. 다만 내가 흥미롭게 느낀 것은 잘 맞는 것보다 안 맞는 순간을 맞이 할 때였다.


대화 속에서 서로의 생각이 다르거나 가치관이 다르면 각자 기분이 상하거나, 흥미를 잃고 끝이지 않나? 끝이 아니었다. 의견 불일치는 나 스스로 사고에 빠지게 했다. 곱씹고, 반박도 하고, 그러다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까 되짚어가다가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치관에 대해 더 확신을 갖게 되기도 하고, 둘 다 자신 만의 논리를 가진 생각이라고 수긍하게 된다. 성숙한 차원에서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는 자극의 순간이었다.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넓어진다. 아니 오직 사람에 의해서만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을 넓히는 일이 가능하다.



보통은 어느 정도 이야기했다 싶으면 한 시간 정도다. 그런데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눈 지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우리가 마신 차는 한참 전에 동나 있었다. 그런데도 줄곧 끊이지 않고 이야기했다. 하나 의미 부여하자면 우리는 같은 차를 시켰다. 새콤달콤한 재스민 자몽티였다.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그녀의 작업실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유를 단번에 파악했다. 그녀의 언어에는 사람을 구분 짓는 말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주하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차분했지만 꺼내는 화제는 매번 흥미로웠고 다정했지만 생각은 단단하고 확고했다.



3월을 지나 보내며, 많은 작가님들을 만나면서 나는 내 오래된 핵심 신념 하나를 깨부수었다. 매번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이어가야만 하는 것이 내게는 숙제였다. 나는 달변가가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대본을 쓰는 날도 있었다. 나는 말을 기본적으로 못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말을 더듬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렇게 굳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대화라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다. 상대방 또한 처음 만나는 사람이 편할 리가 없다.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 나의 경우 귀를 막고 혼자 떠들라고 하면 떠들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대화 상대만 있다면 얼마든지 위트 있고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가족과 둘러앉은 밥상에서, 학창 시절에 내 책상 주변에 모인 친구들에게 나는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직 '나의 작가님'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이와 같은 업무는 4월까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개인적으로 사람들에 대해 느낀 것들을 기록하며 나는 어떤 사람이 이 위험천만한 항해를 믿고 함께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동시에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는 만큼 현재의 인연에 감사한다.



기억에 남는 얼굴은 그런 얼굴이었다. 자신의 세계와 생각이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을 줄 아는 겸손함이 있을 것. 상처받은 나날들이 많을지라도 무례하거나 시니컬하지 않고 친절할 것. 무엇보다 설명할 수 없지만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얼굴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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