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혜 Feb 18. 2022

단막극 대본 읽는 주간

work log no.4

지난주 월요일은 드라마 기획안을 공유하는 날이었고 바로 이튿날 대표님과 회의가 잡혔다. 자신 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불안했다. 재미있는 아이템을 발견했을 때는 반짝반짝하지만 갈고닦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작품 안에 들어와 버려서 '이게 과연 재미있나?' 돌연 의심을 하게 되는 때가 분명 오기 때문이다.


"재미있었어."

그 한 마디를 듣는 순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드디어 놓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까지 나는 대표님 방의 소파에 앉아 어서 의견을 듣고 싶은 초조함인지, 설렘인지 모를 들썩이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마간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또.. 또 이 말이다.'

마음속에서 '재미있다'는 그 말 한마디가 여운을 남긴다. 늘 하는 생각 중 하나. 우리의 일은 그렇게 '재미있다'는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는 것. 그렇게 시작해서 '재미 없어진' 결과물을 무수히도 많이 보아왔다. 차라리 내가 쓰고 내가 욕을 먹으면 속편 하겠다는 생각을 꽤 많이 했다. 그래.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시작하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던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단계의 기획안은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는 것에 대한 회사의 의견을 듣는 동시에 대본을 집필할 작가에게 아이템을 설명하는데 쓰이게 되는 것이다. 대표님께 아이템에 대한 피드백을 추가로 받고 다음 스텝에 대해 논의를 했다. 이제 작가님을 찾아야 한다. 


지난주는 자료집을 모으면서 머리를 비우고 쉬어가는 주간이었다. 그린 라이트를 받았으니 곧장 달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출발점에 서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원안자가 집필한 기획안을 검토하고, 구성을 뜯어서 빠진 것을 추가하고 새롭게 재조립해 의견을 전달한 정도였지만 꽤 많은 공력을 들어간 작업이었던 것이다. 머리를 비울 때는 정처 없이 걷는 것, 즉 '산책'이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업무를 통해 또 하나 나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늘었다. 


이번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신인작가님들의 작품을 검토하고 있다. 한 편의 대본을 보고 과연 8부작 드라마 대본을 쓸 수 있는 작가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지금은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우선 '감성'을 찾아야만 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 만의 반짝이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신이 그런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대본에 표현해낼 수 있는 사람. 단막극 대본 수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간절히 바랐다. 부디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이렇게 바라고, 읽고, 계속 만나다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우리의 프로젝트가 될 성 부른 운명을 타고났다면 가는 거고 아니라면 다른 좋은 것이 오겠지. 


일에 있어서 1번은 실력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히 나라는 프로듀서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맞는 구석이 있어야만 한다. 날 것이라 다소 바보 같은 의견이라도 툭툭 쉽게 던질 수 있는 분위기가 중요하다. 서로의 의견을 기꺼이 들어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바닥에 고집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와는 별개로 귀는 반드시 열려 있어야만 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중 어느 한 명이 프로젝트의 무게를 모두 다 짊어져서는 안 된다. 뛰어난 한 명의 크리에이터보다는 '우리'가 하는 '우리 작품'이라는 감각이 더 중요하다. 나는 그런 팀을 만들고 싶다. 


"역시 기획은 ◻︎◻︎◻︎ (내 이름) "

회사를 잠시 떠난 동료에게 프로젝트의 향방에 대해 전해주었다. '역시 기획은 너지'라며 잔뜩 바람을 불어넣은 탓에 잠시 하늘을 두둥실 날았다. 겸손 떨며 티는 내지 않았지만 기록해 두었다. 칭찬을 기억해 놓는 것은 중요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획을 잘한다는 것이 뭘까? 내 추측에 동료가 말한 기획은 재미있는 것을 재미있게 포장해 앞으로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란 의미가 아닐까 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모든 업계에 '기획'이 다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제작 업계에서 기획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창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업계에서 기획은 사람이 모이는 판을 만들고 그곳에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과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낼 때까지를 잘 지켜내는 것. 그것이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획에 대한 사명감이 있다. 앞으로 모든 발걸음이 다 쓰린 배움이고 경험이겠지만. 로맨스와 드라마는 워킹타이틀, 저예산 공포 호러는 블룸 하우스. 이렇게들 불리는 것처럼 '기획'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와 함께  '◻︎◻︎는 ◻︎◻︎◻︎'처럼 불리게 되면 좋겠다. 


단막극의 내용은 가지각색이라 읽는 재미가 있다. 어떤 장르든 익숙한 구조에서 예상하지 못한 '비틈'이 하나 씩 있다. 슬픔이든 기쁨이든 감정이 매우 선명한 것이 단막극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덕분엔 나는 요즘 계속 울고 웃는다.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구나 싶다. 이 많은 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따스한 느낌이다. 아직도 읽어야 할 것들이 잔뜩 쌓여있다. 아마도 다음 주까지 이 업무가 계속 이어질 듯싶다. 



이전 03화 많은 계획들, 멋진 생각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