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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Jan 25. 2021

기획을 시작하게 하는 한 마디

"재미있는데?"

지난주부터 카페를 이용하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다. 무려 두 달 만에 외부 미팅을 다녀왔다. 지난번에는 카페에서 착석이 불가능해 맥도널드에서 미팅했었는데 말이다. 더군다나 오늘은 기모가 들어간 바버 재킷 하나로 괜찮은 날씨였다. 


R감독님과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 외의 다른 아이템에 대해 지난 해부터 논의를 진행했었다. 오늘 미팅은 우리가 기존에 논의하던 아이템에 내가 추가로 아이템을 디벨롭해서 더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것,  본인이 쓴 시나리오에 대한 의견 전달,  감독님이 중간 전달자가 되어 던져주신 여러 아이템들의 의견 전달이 주요 아젠다였다. 


우리의 일은 피칭이 일상화되어 있다. 피칭은 투수가 타자에게 공을 던지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업계 용어로 쉽게 말하자면 이런 영화 어때요?라고 한번 던져본다는 것이다. 물론 프레젠테이션처럼 아주 공들인 것도 '피칭'이라고 하긴 하지만. 


A : 어떤 이야기인데요?

B : 어떤 이야기냐하면...


이거나 


B :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A :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돼요??


아주 일상적으로 하는 피칭이지만 내게는 그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우선은 별로라는 말을 듣는 것은 기분이 별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인생을 걸어서 만든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유도 없이 계보도 없이 감으로 그저 '아니다'라고 하면서 폄하당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감독들과 이야기할 때는 항상 즐겁다. 설명을 할 때 서로 레퍼런스로 언급하는 영화나 책에 대한 사전 지식이 깔려있어 말이 통하고, 설령 모른다 할지라도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있다. 레퍼런스의 폭이 넓고 깊을수록 더 흥미롭고 심도 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다. 각자의 취향을 인정하면서도 호불호를 넘어서는 재미에는 엄지 손가락을 들고, 흥미가 떨어지는 부분에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만들 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딱 잘라 거부당하는 허망함이 아닌, 더 나아질 방향에 대해 궁리하게 되거나 아예 재미없으니 접고 다음에는 다른 걸 해보아야겠구나 하는 고무적인 기분이 든다.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R감독님이 내게 말했다. 

- 도대체 몇 개의 아이템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다 혼자서 하고 계신 거예요?


말하다 보니 오늘은 내가 픽했던 아이템과 준비했던 아이템 대방출의 날이었다. 다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늘 미팅은 일 이야기에서 시작해 수다로 끝나곤 하니까. 회사에서 기획은 나 혼자 하고 있다고 말하자 감독님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덧붙였다. 

- 버디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일 잘하고, 함께 기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말 통하는 동료가 얼마나 필요한 지 모른다. 당장은 업계와 관련 없는 친구, 가족들에게 짧게 피칭을 하면서 반응을 보곤 했지만 말이다. 우선은 미팅을 통해 감독, 작가들에게 의지해 가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을 기억한다. 감독과 피디가 서로 피칭을 몇 개씩이나 주고받는다. 이야기가 끝난 즉시 바로 그 아이템의 재미있는 점과 레퍼런스가 줄줄이 이어지고, 보강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언급된 죽이는 과거 영화들에 대해서 마치 영화동호회 정모 온 거마냥 떠들다가 나온 아이템을 변주해서 이런 건 어떻냐고 제안한다. 오늘 우리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아마도, '재미있다'일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짜릿한 순간은 "재밌는데?"라는 한 마디를 듣는 순간이다. 그 한 마디가 시작이며 전부이기도 하다. 처음엔 내가 볼 때 재미있어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냥 던진 이야기가 두 명, 세 명이 재미있어서 보고 싶은 이야기가 되면 그때 기획은 출발선상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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