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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Dec 31. 2020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영화 기획과 나의 일에 대해

*2020년 3월에 쓴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지난 2월, 봉준호 감독과 영화 <기생충>이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역사를 다시 썼을 무렵, 언니가 내게 해 준 이야기가 있었다. 언니의 직장 동료가 화제의 소식을 접하고 뚱딴지 같이 나를 떠올렸다고 했다. 


“○○주임님 동생이 영화 쪽에서 일한다고 하지 않았어?”  


봉준호와 <기생충>에서 어떻게 생각이 튀면 ‘영화 쪽’에서 일하는 동료의 동생이 떠오를까? 초월적인 연상의 점프에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작용이 일어날 만큼 영화계가 흔치는 않은 일인가 싶었다. 그런 생각 끝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때 어떻게 표현될지를 상상해보게 되었다. 


영화 제작사에서 일해. 

뭐하는진 모르겠는데 시나리오니 캐스팅이니 투자니 그러던데.

피디라고 불리긴 하던데 방송국 피디 같은 건 아냐. 

술만 마시고 돌아다녀. 연예인? 자주 보고 그런 건 아닌 거 같던데. 


틀린 이야기는 하나도 없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영화 제작사의 기획개발 파트의 직원이다. 소규모 영화 제작사의 특성상 일반 회사의 직급체계가 무의미해서 대리나 과장으로 불리지 않고 보통 프로듀서라고 불린다. 기획개발 파트에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영화화할 만한 아이템을 검토하고 시나리오로 개발하는 일이다. 업계에서 기획개발만 도맡아서 일한 지 올해로 8년 차. 나는 오늘도 다음 작업을 앞두고 이렇게 생각한다. 


당신과 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영화라는 매체는 모두가 알다시피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낸다. 나의 학부 졸업작품만 해도 20분 단편영화인데도 불구, 예산 500만 원에 스태프는 13명 정도였다. (10분짜리 단편영화에 예산이 천만 원 단위가 훌쩍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막대한 돈과 인력이 모두 구현되지 않은 단 한 줄의 이야기 혹은 80장-100장 정도의 시나리오를 두고 왔다 갔다 한다. 물론 업계에서 오래 몸 담고 일하다 보면 시나리오만 봐도 이건 가능성이 있구나 아니구나가 직관적으로 판단이 되지만, 이 사실을 상기하면 나는 새삼 놀라게 된다. 시나리오란 모두가 함께 아직 구현되지 않은 하나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설계도이다. 성공한 유명 감독이 주도해 그린 설계도라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 온전히 지면에 그려지고 온전하게 영화가 될 확률이 크다. 하지만 제작사가 개발하는 설계도는 끊임없이 우리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통해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을까? 그 시작이 난 영화에 있어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단장은 스토브리그 기간과 새 시즌 동안 팀이 강해지도록 세팅하는 것이고 
감독은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의 가슴속에 불을 지펴야죠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드림즈 단장, ‘백승수'의 대사다. 나는 어쩌면 기획/제작자도 비슷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에겐 감독과 배우가 가장 알려진 직군일 터다. 그리고 아마도 기획자보다는 제작자가 더 익숙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 제작자가 보통 기획자를 겸한다. 기획은 좁게는 영화화하기 위한 아이템을 기획 및 개발하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기획'은 단어의 사전적 정의대로 아주 포괄적인 영역으로 보는 게 맞다. 사실상 영화가 될 만한 단 한 줄의 이야기에서부터 완성된 영화가 극장에 개봉해 관객에게 선을 보일 때의 모든 과정이 기획의 영역에 포함된다. 할리우드의 경우를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Excutive Producer'라는 크레딧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감독보다 제작자의 힘이 막강한 할리우드와 한국은 조금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주로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 (단, 다양한 방식의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대략적인 것임을 참고할 것) 


     모두가 읽고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나리오 개발   

     이를 구현해낼 감독의 고용   

     관객들이 티켓을 살 만한 파워가 있는 배우 캐스팅   

     이 세 가지를 포장, 즉 패키징 해서 투자사에 제안해 그린라이트를 받기까지의 과정   

     그린라이트를 받아내고 예산을 합의하는 동시에 영화 제작 현장 프로듀서의 고용   

     영화 제작이 들어갔을 때 약속한 예산과 시간 안에 우리 모두가 합의한 영화를 구현해 납품하는 것   

* ‘그린라이트'는 좀 지난 예능에서 남녀관계의 호신호를 의미하는 용어로 알려졌지만, 오래전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영화 용어다.

우리가 잘했는지 아닌지는 선수들이 잘해야 확인이 되니까 
우리끼리 잘했다고 먼저 확신하면 안 될 겁니다. 이 일이 그런 일이죠?


역시 <스토브리그>의 백승수의 대사다. 이 대사는 중요한 장면도 아니고 명대사 순위도 들지 못했지만 나는 유독 이 대사가 오래 마음속에 남았다. 왜냐하면 이 일이 바로 제작자도 기획자도 아닌 제작사의 직원으로서 하고 있는 일로도 설명이 될 수 있어서였다. 

3년 차가 되어 처음으로 아이템을 하나 맡은 적이 있다. 작가와 반년을 고생해 시나리오를 뽑아내고, 두 번 정도 수정을 거쳤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와 원인들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소통이었다. 내가 전한 바가 작가에게 제대로 소화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작업은 진행되었다. 서로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소통의 문제에 이어 개발이 진행되고 초고, 수정고가 나오다 보면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결과물을 보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손발은 맞췄다. 그래서 최종 결과물의 퀄리티는 어떠한가? 결국 우리가 꾸는 꿈을 당신은 제대로 구현해 냈는가? 우리가 아무리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해도 감독이나 작가가 제대로 구현할 실력이 없었다면 그건 실패다. 그렇다면 그 실패는 누구의 탓인가? 


생각해보자. 내가 최선을 다 한다고 해서 죽이는 시나리오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유명 배우들이 턱턱 출연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아니고, 영화가 제작에 들어가 관객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판을 깔기에는 아직 부족한 나는 깔려있는 판에 들어가 재능 있는 작가와 감독들이 좋은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돕는 일을 맡을 뿐이다. 쉽게 말하면 제작자나 기획자의 손과 발이 되어 일하는 것이다. 이 일은 보통 잘 되어갈 때는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잘못되어 가고 있을 땐 내가 제일 먼저 호출된다. 변명하고, 설득하고 내가 방패가 되어야 한다. 


사실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괴로운 것은 아무리 내가 발버둥 쳐도 ‘시나리오'의 형태를 구현할 작업자들에게 결과가 달렸다는 것이다. ‘내가 한 일 = 결과 = 나의 책임'이란 등식이 명확히 일치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언제 빠져들고 빠져나와야 하는 지의 경계선에서 늘 헤맨다. 작업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열패감에 시달리고,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마냥 얼굴이 화끈거린다. 쉽게 과민 반응하고 과몰입하게 된다. 쉴 때도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스토브리그>의 대사를 떠올리다가도 불쑥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야구는 시즌에 들어가면 경기는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꼴찌를 하더라도 다음 시즌이 있잖아요. 하지만 영화는 영영 구현되지 않은 채 납작한 복사용지에 남아 사라질 뿐입니다. 


당신과 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습니까? 우리 그 꿈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부디 내 말이 그 어떤 것도 소실되지 않은  채
온전히 당신에게 닿을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는 계속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꾸고 있는 꿈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꿈은 배우와 투자배급사에게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관객의 꿈으로 연결된다. 할 수만 있다면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모조리 꺼내 보여주고 싶고, 감독이나 작가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열어서 보고 싶다. 일차적으로 나는 우리가 같은 꿈을 꾸고 있길 바란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내 눈 앞에 더 놀라운 것을 구현해 주기를 바란다. 창작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깃발을 든 채 길을 잃지 않도록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일,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낼 놀라운 것을 떠올리는 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정도가 되길 바랄 뿐이다. 

일이 잘 안될 때는 미친 듯이 외로운 일이다. 혼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산에 버려진 것 같다. 제일 끔찍한 것은 다음 작업이 하나도 기대가 되지 않을 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괴롭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래도 나보단 당신이 더 외로울 테지. 그래서 난 당신 곁에 있을 것이다. 함께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영화 기획 개발의 일이자 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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