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k log no.14
지난달 초에 나에게 맡겨진 프로젝트는 월요일에 일단락되었다. 원천 IP를 한국용으로 시리즈화하는 프로젝트였고 회사 이름으로 최종 정리한 기획제안서를 파트너사에 던졌다. 말 그대로 피칭한 것. 현재는 피드백을 대기 중이다. 예상하기로 이번 주까지는 번역 작업이 이루어질 테고 다음 주나 되어서야 의견이 도착할 것 같다. 어쨌든 제작사인 우리 회사에게만큼은 컨펌을 받은 단계라 나름의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다. 이 성취감에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모두가 맡기 싫어할 프로젝트였으며, 어려워했던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일단 기본적으로 말이 되게 만들었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재미있다'는 말을 꺼낼 수 있도록 기획했던 것이다.
나는 꽤나 다양한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다. 영화나 드라마, 만화/웹툰, 웹소설, 게임, 애니메이션, 뮤지컬과 같이 이야기라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다른 형식의 것들도 두루 관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취향은 있지만 그 취향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이런 성향 때문에 내게 있어 프로듀서라는 직업의 장점이라면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다채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프로젝트는 한번 파볼까 하고 호미를 들이댔는데 감자를 캐듯 줄줄이 딸려 나와서 하나의 기획이 성립이 되는 반면, 어떤 프로젝트는 아무리 파봐도 뚝뚝 끊기고 만다. 분명히 잘 찾으면 하나로 연결되는 지점이 있을 텐데 그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정리가 잘 되지 않는 프로젝트의 장르가 나에게 맞지 않는 걸까? 아니면 결국엔 기획이 핵심인 소재가 아니라 시나리오의 디테일과 감독의 연출로 살려야 하는 소재였기 때문일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내가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기획적으로 살릴지 고민하고 있는 것부터 어긋나 있었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기획 프로듀서인 나는 기획적으로 엣지를 살려 후킹 하는 작품을 고민하고, 기획 포인트를 잘 어필해서 사람들을 꼬신 후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일을 하고 있다. 기획적으로 부족하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괜찮은 작품을 어떻게 포장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되었다.
제일 이상적인 것은 상업 영화가 기획적으로도 좋고 작품 내적으로도 좋은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싶게끔 만들면서, 보고 난 후에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다는 만족감을 주는 것. 그야말로 원투펀치다. 그런데 시나리오조차 나와있지 않은 기획 초창기 단계에서부터 굳이 핸디캡을 달고 기획을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계속 매달렸던 이유는 단 하나,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정 사람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버리면 기획은 훨씬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갈 수 있을 터였다.
공을 던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 기획자의 손에서 비로소 기획이라는 공을 던지게 만드는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일까? 기획자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 있는 다양한 요소들에 화학작용을 일으켜 단 하나의 유니크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그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무엇, 요소 말이다.
기본은 데이터 베이스다. 관련된 수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각종 장르의 각종 이야기와 장면에 대해서 보고 듣고 읽은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천재적이긴 하나 업계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업계는 기존에 알고 있는 것에 빗대어 설명해야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각 장르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는 중요하다.
데이터 베이스를 쌓을 때 무조건적으로 머리에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아카이빙 기준이 있어야 한다. 본인이 재미있게 보고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과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들이 가장 중요하다. 취향에 맞지 않거나 재미없는 것을 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 어떨 땐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것에 대해 정리할 때 그 기준이 더 명확하게 보인다. 데이터 베이스를 쌓아야 무엇이 '재미'인 줄 아는 기준이 생긴다. 그리고 기획을 할 때 이 기준에 부합을 해야만 기획자는 비로소 공을 던질 수 있다. 적어도 내가 봤을 때 재미가 있어야 남에게 재미있지 않겠냐고 제안할 수 있는 것.
기획 프로듀서는 기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고민할 뿐이다. 기획을 할 때부터 뛰어난 작가와 감독이 붙을 작품이므로 탑플레이어 자체가 기획 포인트라는 것은 아예 성립되지 않는 상황이거나 혹은 기획 프로듀서가 없는 프로젝트다. 그렇다고 실력과 노련함이 부족한 신인 작가와 감독을 먼저 염두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들이 가능성 있고 재미있는 책(시나리오)을 가져와야 하는 것이지 기획 프로듀서가 작가와 감독의 영역까지 커버를 치는 기획을 할 수도 없다.
즉 기획 프로듀서는 오로지 기획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기획하고, 상황이나 제작비에 맞추어 인력들을 배치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내 기준이다. 적어도 나는 다른 누구를 내세우는 기획은 기획자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그건 내세워진 사람이 기획자다), 다른 누구를 대신하는 일을 기획이라고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어떻게 하다 보니 나 외에 다른 두 명의 친구들이 합류하게 되었다. 한 명은 나와 10년, 다른 한 명은 무려 15년 차이가 났고, 두 사람 다 기획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은 없었다.
업계에 처음 일하는 사람, 혹은 오래 일했더라도 기획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발전적인 이야기나 아이디어는 제시하지 못하고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별로인 부분을 집어내는 것에 그친다. 전 국민이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지켜보며 하고 싶은 말은 다 쏟아내는 세상에서 지적질은 가장 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사람의 의견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반대편의 의견은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본 게임에서 공을 던지기 전에 내 공을 받아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테니스라고 친다면 네트 저편에 나의 공을 받아줄 사람이 있는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투자자에게 하는 피칭은 공을 받을지, 받지 않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결정적인 공을 던지기 전에 나는 내가 무수히 던지는 공을 받아줄 사람,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공을 받아쳐서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기획 초안을 검토하고 종합적으로 가장 적절한 피드백을 주는 대표, 최상급자이자 최종 책임자의 의견도 매우 중요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보아야만 성공하는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들어야만 한다. 물론 프로젝트를 발전적으로 볼 줄 아는 사람에 한해서.
예전에는 꾸준한 노력이 창의성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매일매일 끈질기게 프로젝트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야 알게 된 것은 그래 봤자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사람의 머리보다는 여러 사람의 머리에서 더 많은 것들이 나온다. 심지어 여러 사람이 생각하면 하루 종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본능적으로 나는 여지를 많이 열어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께 생각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 방식이 옳았다.
내가 공을 던질 수 있도록 했던 것은 무엇일까? 정리를 해보자면 데이터 베이스, 그것을 바탕으로 무엇이 내게 재미있고 또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지 분별할 줄 아는 것, 명확한 기획자의 영역에서 발전적인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했던 것. 이 모든 것들이 있었기에 내가 비로소 공을 던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누군가에게 던질 수 있는 공이 된 것이다.
다른 어떤 순간보다 처음 프로젝트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의 친구가 마지막엔 재미있다고 말했던 순간이 가장 짜릿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가 실제로 재미있어졌다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처음에는 외부자의 입장으로 냉랭하게 판단했던 친구가 프로젝트 내부자로 전환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에게 너도 이제 프로젝트 안으로 들어와서 객관성을 잃기 시작한 거라며 웃었다.
업무는 거의 두배 가까이 늘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당최 기획이 되지 않던 프로젝트는 그 이유를 알았으니 슬슬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상황 자체가 어긋났다기 보단 정정하자면 나 역시도 노련한 최전성기의 피디가 아닌 아직 젊은 녀석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