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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Nov 16. 2022

도장 찍기 전엔 모르는 일이랍니다.

이 계약을 엎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을까?

돌아보니 올해 두 번 정도 계약을 엎었다. 숱한 무산과 번복을 지켜보며 이 바닥은 원래 뭐든 될 때까지 된 것이 아니니 도장 찍기 전엔 모르는 일이었다. 스타 배우가 출연 결정을 돌연 번복하여 영화 제작 자체가 무산될 뻔한 직격타를 맞아본 적도 있다. 도장 찍기 전뿐이랴? 도장 찍은 후에도 얼마든지 상황은 반전될 수 있다. 다만 이처럼 계약이 엎어진 적은 많지만 내가 스스로 계약을 엎었던 적은 없었다. 치열하게 고민했다. 동료들에게 조언도 구했지만 결국 선택은 나의 몫이었으므로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하는 수 밖엔 없었다.


내 감정이 중요하다고 했다. 최근 계약 건을 두고 고민할 때 대표님이 말씀하셨다. 그 말이 왜 계속 파동이 되어 내 안에서 울렸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까지 내게 가장 중요한 한 마디는 '재미있다'였는데 '내 감정이 중요하다'는 어쩐지 비슷한 울림과 묵직함이 있었다. 


감정이라는 것은 계약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요소인 것 같다. 그런데 기획 프로듀서에게 감정은 엔진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젝트의 동력은 작품 내적인 재미에서 시작한다. 프로젝트가 실질적으로 진행되면 재미와 함께 외적인 상황과 마주하면서 뚫고 나아갈 더 강력한 동력이 필요하다. 그때는 프로듀서의 경험에서 온 관점이나 직관이 중요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듀서의 '감정'은 '재미'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이며, 깃발을 처음 들고 일어선 사람이 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든 전투를 견뎌낼 수 있는 핵심 동력인 것이다. 


그래서 계약을 엎었다. 감정이 상해서 계약을 엎은 것이 아니라 감정이 따라주지 않았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함께 할 예정이었던 크리에이터와 발전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영상화하려고 추진했던 원작이 무리해서 진행할 만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내 감정이 거기서 그쳐 버린 것이었다. 


내게 선택권이 없었더라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방법을 찾았겠지만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내 감정을 따라가고 싶다. 그것이 곧 프로듀서의 철학이 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있어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고 지극히 주관적이다. 모두가 아름답다 찬양하는 것을 눈여겨볼 수는 있지만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군중 속에서 대다수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끄덕일 수는 있어도 내가 투사가 되어 깃발을 들고 아름답다고 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계약을 엎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을까?

불안했다. 내 판단과 선택이 불러오는 많은 가능성의 영역이 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선택에 따른 다양한 나라는 사람의 평행세계를 아득하게 굽어보듯이. 하지만 난 한 번도 내 선택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고, 앞으로도 현재의 내가 판단하여 선택한 이 우주를 힘껏 끌어안을 자신이 있었다. 


John Singer Sargent, Two Girls Fishing,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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