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의 회고
대표님은 기대어 있던 소파에서 몸을 고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무되어 말했다. 우리는 늘 티타임을 가지며 업무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하면서 느낀 점을 나누기도 한다. 그날은 기존의 업무가 아닌 비즈니스 모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한껏 설레었고 무언가 시작되었던 날이었다.
시작의 순간을 접하면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상적인 미래가 금방 폭죽 터지듯이 팡팡 그려진다. 준비하던 영화가 개봉할 시점에는 행사 때 입고 갈 옷을 세 벌 정도 샀던 것이 기억난다. 한 번에 세 벌을 산 것이 아니라 개봉이 밀려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사서 세 벌이었다. 일을 제안받거나 회사에서 업무를 요청받을 때도 내 눈에 반짝거리고 재미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착수했다. 이렇게 설레발치며 김칫국 잘 마시는 사람이 나였다.
3월에 들어서자 새로운 시작들이 한 다발 안겨 들어왔다.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는 컨셉아트 작업이라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고, 시리즈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업계 와도 일을 연계할 예정이다. 새로운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작가와 일을 하게 될 예정이고, 인력을 고용해 함께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일기장을 돌아보니 나는 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일을 충분히 해내지 못함에 ‘죄책감’을 느꼈으며, 내 계획을 흩트리는 것들(가족, 건강, 세상)에 히스테릭한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과 협력하는 일이며 ‘관계에 의한 정서적 불확실성’에 기대는 일이 대부분이다. 매번 겪는 케이스도 케이스마다 달라서 일단 부딪혀 봐야만 했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의 특수성이라고 볼 수도 없다. 삶 자체가 절대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며 계획은 지켜지지 않는다. 설레며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에서 나는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일에 있어서는 인정과 칭찬을 받고 있다. 그 달콤한 장면을 기대하면 할수록 현재의 나는 반대로 두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나의 의견과 요구를 관철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과 싸움이나 신경전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끊임없이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일의 연속인데? 어떤 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형태의 프로젝트를 맡고 있으므로 물리적으로 혼자서 1부터 100까지 다 채운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일에 대한 즐거움과 기대와 설렘이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왔다. 그 마음은 나를 항상 긴장 상태로 만들었으며 불안을 키워갔다. 결코 현실이 될 일이 없는 미래의 허상에 매달리고 있었다. 내가 상상한 미래는 영영 오지 않는다. 불안해서 더 열심히 일하고 준비할수록 불안이 커져가는 까닭은 거기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불안함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희망을 버리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신경 쓰지 말 것. 내가 바라볼 곳은 ‘지금 여기’였다. 오늘 한 일은 다른 가능성을 모두 포기하고 ‘선택’ 한 것이다. 거기서 의미가 생긴다. 오늘의 내게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된 것이다. 미래의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기에 미래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영영 충족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지난주 내내 반복된 키워드인 ‘설렘’과 ‘불안’에 대한 실마리는 올리버 버크만의 <4000주>를 읽으면서 찾을 수 있었다. “무한한 가능성이 끝없이 자라나는 상상의 왕국을 지배하려 하지 마라” (Geshe Sawopa) 나는 월요일인 오늘, 나를 돌보는 일을 하고 글을 써서 정리를 하기로 ‘선택’했다. 이번 주는 어떤 사건이 나를 부를까? 결코 알 수 없으니, 나는 남은 오늘 저녁을 어떻게 즐겁게 보낼지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