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년 차 기획 피디의 기록
2015년 1월 1일
시놉시스 밑작업 하려고 했는데 생리가 시작되고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내 잠만 잔 것 같다. 주말 내로 무조건 끝내야 한다. 금~토 구상하고 일요일에 쭉 쓰자. 정해진 일정에 딱 맞출 필요는 없어도 일단 1차 아웃풋은 필요하다.
2015년 1월 2일
신사에서 교수님과의 만남. 어디서 아이템을 얻냐는 질문에 판에 박힌 대답을 했다. 그에 대한 선생님의 조언은 놀랍도록 내 귀에 쏙 들어왔다. 영화 전공을 살려, 많은 영화를 보고 분석하여 '조합'하라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무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려면 각각의 질료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공부해야 한다. 아직 갈길이 멀다. 회사생활은 항상 불가근, 불가원의 원칙을 지킬 것.
2015년 1월 4일
집 앞 스타벅스에서 작업했다. 모 아이템 시놉을 1차 완성했다. 뒷부분은 거의 스케치 수준이지만. 아직 글에서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 언제쯤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장르 연구. 1월은 '스크루볼 코미디'
2015년 1월 7일
감독님과 회의 진행 후 머리가 멍해지는 한편 도전의식도 느꼈다. 사실 감독님이 그 자리에서 하셨던 말씀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벽이었다. 더 높이 높이 뛰고 싶은데, 그 경치가 손에 잡힐 것만 같은데. 사실 그 경치는 신기루라고 불러도 될 만큼 먼 곳에 있는 것이었고, 난 다시 내가 있는 시궁창으로 돌아오는 듯한. 그런 기분이랄까.
내가 과연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드는데 과연 그날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것. 그날까지 무수한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데 지금은 일단 바보 같고 잘하지도 못하는 채로 가야 하니까. 장비고 무기도 돈이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던전을 헤쳐 나가야 하니까. 그게 미칠 노릇인 거다.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는 거고. 답은 정해져 있지. 계속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쓰고, 보고,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이 시간을 참아내야 해. 견디자.
2015년 1월 9일
<우리가 밤에 본 것들>을 읽으면서 무척 사랑이 하고 싶었다. 로브는 앨리의 꿈이었고, 영원이었다.
2015년 1월 21일
비품 관련해서 매일 사무실 출근하면서, 가장 인쇄를 많이 하는 팀이면서, A4용지 수량 체크도 안 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화가 솟구쳤다. 도대체 누구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다들 일을 안이하게 처리하는 걸까.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안 되는 건 안되지 않을까? 그런 부당함을 느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자. 나의 비교대상은 오로지 과거의 나, 미래의 나일뿐이다. 어떤 집단을 다 알기 위해서는 1년은 있어봐야 한다고 J피디님이 말씀하지 않았던가. 이제 8개월째다. 인내하자.
2015년 2월 4일
그래.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이렇게 단기간에 성장할리가 없었다. 그동안의 나의 갈증이 좀 더 명확해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고칠지 지금은 매우 아득하지만 끝까지 노력한다면 결과와 상관없이 내게 많은 것이 남고 또 몸으로 많은 것을 익히게 될 것이다. 이 갈증과 조급함을 연료로 삼되, 절대 절망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자. 아직 어린 나이. 업계에 들어온 지 3년 차. 만 2년. 이 정도의 발전도 놀라운 것이라 생각한다. 동기들이 그것을 증명해주지 않았던가. 내가 어디에 있건, 어떤 상황이건 계속 두 다리를 움직여야 하고 계속 쓰고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올해 목표는 S피디님 말대로 '될 만한' 프로젝트에 올인해서 작가님과 작업을 시작하는 것! 시놉시스 피칭 한 작품 통과 시켜서 꾸준히 작업하는 일! 당면한 회사의 빅 프로젝트보다 이와 같은 일들이 내가 앞으로 커리어를 쌓고 네트워크를 쌓는데 더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2015년 2월 13일
어젯밤 뭔가 마음을 가득 채우는 콘텐츠가 보고 싶었는데 딱 베르세르크가 눈에 들어왔다. 너무 재미있는 거지! 왜 재미있었을까. 아무래도 작품의 가장 주요 갈등이 좋았고, 사투를 벌이는 가츠와 대결하는 그리피스의 구도, 매의 단과 관련된 인물들의 감정이 소용돌이쳤기에 강력한 흡인력을 가진 것 같다.
캐릭터 구축이 너무 잘되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상징만 남기 쉬운 인물 설정이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이념, 가치관의 상징으로 그려지기 쉬운 가츠와 그리피스 캐릭터에 생동감을 부여해준 건 매의 단과, 미들랜드에서의 일들이다. 설정된 인물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그 인물의 캐릭터라고 했다. 그 점에서 황금시대와 강림까지의 에피소드는 가츠와 그리피스의 대결이라는 최후로 달려가기 위한 여정에 독자들을 이끌어 나가는 힘이 된다.
강렬하고 무척 원형적, 신화적 스토리라 재미있었다. 감정묘사도 섬세하고, 액션씬도 말할 것 없고.. 주제의식도 좋다. 어떻게 이런 스토리를 생각해 냈을까? 나도 이런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 매번 나의 가장 큰 문제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리가 안 되는 것이다.
2015년 2월 15일
베르세르크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다. 이토록 끌렸던 이유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가, 얼마나 어리석고 같은 실 수를 되풀이하는가와 같은 보편적인 인간 근원에 대한 고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매의 단 이야기를 다룬 황금시대가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그토록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쳐 올라간 자리가 쉽게 무너져 내린다. 현실을 가장 위태롭게 만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로 이때까지 이룩한 것들이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리피스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으리라. 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결국 그가 동료들을 제물로 바치게 된 건 인간적인 이유에서 이해가 된다. 더 이상 그는 휘둘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무력한 인간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동료를 제물로 바쳐서라도 신이 되고 싶었던 거다. 그 욕망은 무엇인가. 가츠 역시 고민했던 것. 무엇이 우리를 욕망하게 만드는가. 그런 근원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가츠에게 놓인 과업. 그리피스에게 복수할 것인가 캐스커를 지킬 것인가. 이 딜레마도 상당히 어렵다. 극화된 작품이지만 우리의 보잘것없는 삶 역시 치열하고 처절하긴 마찬가지다. 산다는 것은 처절한 일이다.
2015년 3월 5일
오늘 회의했던 것은 개인의 의견일 뿐. 이 아이템을 끌고 가는 사람은 나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생각을 잘해야 한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내버려 둘지. 이 선택이 시놉시스 피칭을 준비할 동안 내가 가장 유념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은 '참고'하라. 옳다는 방향으로, 자기 자신을 믿고 가는 부분도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이야기는 끊임없이 표류한다. 무게 중심을 잡자. 일단 말이 가장 많았던 것은 셋업. 이건 꼭 해결해야 한다.
2015년 3월 22일
시놉시스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오늘에서야 겨우. 첫 구절에서 방황하다 그럴듯한 오프닝 이미지가 떠올라서 진행했는데 계속 글이 길어져서 낭패다. 대다수의 반응이 시놉이 짧았을 때 더 재미있다고 했으니 최대한 간략하게 가야겠다. 길게 해 봤자 짧을 때 재미없으면 그냥 재미없는 것이다. 노선을 정하자 확실히. 노력과 성실은 배신하지 않는다. 단단하게 짜여 있는, 단단하게 다져놓은 내 이야기를 자신 있게 소개하자.
2015년 3월 24일
일단 오늘은 2막까지만 확신을 가지고 쓰는데 매진한다. 3막은 1막과 2막에 비해, 정신적 부담감이 덜하다. 이 작업은 어시스트로 들어 가 있는 메인 프로젝트와 다르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하는 상사도 없고 이런 아이디어로 무조건 진행하라는 감독님도 없다. 나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확신을 가지면서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누구에게 잘 보인다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그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정해진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 결과가 부족하다면 아직 내가 미숙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아갈 뿐이다.
2015년 3월 25일
끝났다. 시놉시스 피칭 사전문서. 내 손을 떠났다. 일단 오늘은 머리를 비우자. PPT작업, 노가다가 남아있다. 남은 체력을 비축하자.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구경하고, 꽃향기를 맡고, 햇볕을 쬐고, 강물의 흐름을 바라보고, 때론 가만히 그리고 때론 타박타박 걸으며 책을 읽고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그런 여유로운 여행을 떠나는 날이 어서 왔으면. 일주일 후에는 그토록 바라던 날들이 찾아오겠지. 방사능 때문에 위험하다고들 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일 것 같다는 생각.
2015년 3월 30일
연습, 연습, 또 연습!! 하루 종일 연습하기. 특히 시놉시스 부분.
피칭을 여태껏 여러 번 해왔는데 아직도 떨리고 긴장된다. 시놉시스 피칭 준비를 하다 보니 아이템 피칭은 참 쉬웠다는 생각이 든다.
2015년 3월 31일
후회가 없다.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이 과정 속에서 기획자의 자세에 대해 배운다. 일단 나는 할 일을 했다. 두고 봐, 다음번엔 꼭! 내 이야기에 당당하고, 내 이야기에, 내 노력에 당당하다. 그 이상이 안되었다면 깔끔하게 포기가 가능하다. 그래서 항상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 항상 심플해지는 것이 어렵다. 내용, 즉 기획도 그렇지만 글 쓰는 것도.
2015년 4월 8일
2개월만 지나면 나도 이 회사에서 일하게 된 지 1년 째다. 인턴을 할 때는 1년이 참 길었는데, 여기서는 시간이 안 가는 듯하다가도 훌쩍 흘러 있다. 계약직이 아닌, 정직원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계약직일 때는 단기간에 끝나는 무수한 일들을 하게 되고, 모든 것이 새로웠고, 모든 것에 더 많은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 반면 이곳에서는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니 같은 시간이라도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언제 내가 여기까지 온 걸까. 생각해 보면 4학년 마지막 수업에 제출할 졸업영화 시나리오를 쓰던 때부터 달리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열기와 같은 감각. 모든 경험들과 기억들이 합쳐져 지금의 나를 지탱한다. 난 내가 참 자랑스럽고 또 사랑스럽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진정하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2015년 4월 14일
이번 달 피칭 아이템에는 꼭 하나 오리지널 아이템을 넣고 싶다. 하지만 내가 떠올리는 것에는 특별한 색깔이 없다. 돈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조급해하지 말자. 다만, 노력은 좀 해야겠다. 신문을 보던가, 잡지를 보던가, 별 것 없는 정보라도 지속적으로 접하는 것이 필요하구나. 그런 생각들. 방법을 찾아야겠다.
2015년 4월 17일
그간 사람을 만나지 못한 탓으로 4월은 미팅의 달이라고 내 나름대로 지정을 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충만해지기보단 소모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그냥 잔소리가 듣기 싫은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 열심히 하면 나가떨어진다는 둥, 재미있게 하라는 둥, 그렇게 살다 보면 나태해진다는 둥,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건지. 회사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면 늘 기분이 나쁘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나를 지치게 하고.
좋은 이야기, 달콤한 이야기만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내 욕심이라서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보다 어리고, 위태로워 보이고, 달라 보인다고 해도. 나는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개소리는 흘려듣고, 취할 것만 취하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재미있고, 즐겁고, 충실하게 살자. 바쁘고 유익하게. 더 나은 미래, 어제보다 나아진 내가 되기 위해서.
2015년 4월 22일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 했는데, 아무래도 반복되다 보니 신경 쓰이고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그녀에게 고마웠던 것. 다른 부분은 잘하고 있고, 그 부분을 이해했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할지라도 누구에겐, 이런 면이 이런 면이 있다고 인정해 준 것. 꾹꾹 눌러 담는 면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 선을 넘어서면 뾰족뾰족 튀어나오는 거라고.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맞다. 그것이 내 본질이고, 기질이다. 모두들 인간관계든 일이든 긴장을 풀고 편하게 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조절이 안된다. 사람들은 모두 힘들고 짜증 나는 부분을 참고 살아간다. 나도 그렇다. 다만 본인이 생각한 한계나 경계를 넘어서면 강경하게 대처한다. 그것이 일종의 폭발로 드러나게 되는데 폭발이 아닌, 좀 더 차분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아직 나는 그 적당히 힘을 빼는 방법을 모르겠다. 사람들의 걱정은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으로 상냥하게 받아들이고, 나는 나의 길을 가자. 어떻게 그들이 나에 대해 다 알겠는가. 친구도, 가족도 아닌 것을. 평소에 나에 대한 생각을 몇 분조차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는가. 단지 그들은 표면으로 보이는 모습에, 그들이 이제껏 경험한 인물타입을 적용하는 것뿐.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오해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결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다음 달이면 이 회사에 다닌 지 1년째. 1년 사이에 또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성장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더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평균 이상이 될 수 있다. 나는 이제껏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이제 해보고 싶다. 내 분야에서. 1등이란 것은 의미 없지만 적어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정도는 되고 싶다.
2015년 4월 26일
영화는 소비자를 만날 때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리고 본래의 목적이 훼손되기 쉽다. 그에 비해, 웹툰이나 웹소설은 작가 본인이 생각한 그대로 소비자들에게 직접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문학적 완성은 내게 거대한 꿈이다. 나는 그저 내가 재미있어하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 이걸로 회사를 다니면서 다른 활로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잡자. 지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이다. 비록 피칭은 코 앞이지만, 오늘은 주말이니까. 자료조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여름의 입구는 총 3 부지만 각각의 챕터들이 그 자체로 완결되는 단편소설로. 지금 당장. 오늘부터 시작하자.
변모하는 꿈.
그에게 완전한 이별을 통보한 후, 3년이 흘렀다. 인연이란 두껍고 질긴 끈을 끊어낸 후 해방감마저 느꼈다. 그는 내 대학시절의 첫마디이자 마침표였다. 그에겐 특별함이라곤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 안에서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는 거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탓인지 계속해서 그의 꿈을 꾸었다. 나는 그를 단호하게 끊어냈지만, 내 무의식은 끊임없이 그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괴로웠다. 꿈속에서 그는 늘 나를 못 본 척하거나 무시했다. 반대로 내가 못 본 척하거나 도망칠 때도 있었다. 내용은 달랐지만 행동은 늘 이처럼 반복되었다. 꿈을 꾸고 난 날은 그 꿈이 남긴 여운이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그 여운이 가시지 않는 하루동안 나는 그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의 꿈은 최근에 들어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와 나는 꿈속에서 이제 막 시작한 연인이었다. 실제 기억만큼이나 풋풋하고 달콤한 꿈 속에서 나와 그는 시종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함께 하는 내내 옅은 심장의 고동마저도 생생하게 느꼈다. 이건 어떤 징조일까, 계시일까, 하고 소녀처럼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내가 꾸는 꿈을 그 역시도 나와 동시에 꾸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했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잃고 싶지 않다는 발버둥이었다. 그에게 나는 지금 어떤 의미로 남아있을까. 흔적조차 남지 않은 과거의 먼지이진 않을까. 확신하며 당연한 일임에도 쓸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도대체 그가 뭐길래! 처음이라는 것 외엔 아무 의미도 없는 남자! 그래, 그는 이제 내게 의미를 잃었다. 지금 떠오르는 감정들은 단지 과거의 산물일 뿐. 모두 흘러가버린 과거의 환영일 뿐.
2015년 5월 4일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현재를 감사히 여기자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일까. 게으른 것이 아닐까. 이것도 일종의 삶에의 투쟁에 대한 태만이 아닐까. 어느 집단이나 문제가 있다며 일반론이 그러하니 넘어가라는 말이 과연 맞는 걸까. 이 회사를 다니면 다닐수록 그런 의문이 그치질 않는다. 이제 1년 지났다. 앞으로 2년, 치고 올라가던가 다른 살 방도를 끊임없이 모색하던가. 아니 둘 다.
2015년 5월 15일
예상치도 못하게 다리가 아픈 바람에 이번 주에는 일을 많이 하지 못했다. 기획안도 생각만큼 안 나오는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니 스스로 가시방석 심정에 모든 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3-6-9의 법칙이 다시 3-6-9로 시작되고 있다. 반복되는 일이 어찌나 지겨운지. 이번 피칭 아이템은 확실히 뾰족하진 않다. 그것에 너무 발목 잡히지 말자. 이 과정이 내게 의미 있기 위해서는 회사의 기준 외에 나 스스로의 목표에 부합하는 결과물이어야 한다. 물론 아직 너무 부족하지만 나의 현주소, 현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오리지널 아이템을 준비하는 시도가 중요하다. 남들이 뭐 라건. 피디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둥, 리메이크가 더 빠른 길이라는 둥, 많은 말들과 평가가 오가고 시끄럽게 내 앞에서 떠들어대겠지만, 난 이것이야 말로 내가 갈고닦을 수 있는 무기이자, 내가 하고 싶은 일에 가까운 방법이라 생각한다. 당장은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고, 내 존재가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그래서 당신들이 뭐라 뭐라 짖어대겠지만. 난 내 인생을 나만의 방식대로 갈 것이다.
내가 확신하고 내가 판단한 내 길을 갈 때에만 삶은 가치가 있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뿐더러 후회가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순간,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버릴 것이다. 어떤, 그 어떤 누가 인정해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선택이라도 내가 '즐거웠어! 이거면 됐어!' 라며 털고 일어날 것이다. 언제나 난 그래왔으니까. 그래서 항상 최고가 된 적은 없지만, 언제나 즐거웠던 것 같다. 아무튼 내 길을 가자.
이번달 아이템이 내겐 도전이다. 잘 풀리지 않아도 스트레스받지 말자. 그것이 원래 내 모습이고, 난 아직 더 노력해서 가야 하는 과정 중의 단계니까. 잘 안 풀리면 셋업. 컨셉만 명확히 할 것.
2015년 5월 20일
과연 내가 앞으로도 감독을, 감독의 꿈을 꿀 수 있을까 했을 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장점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생각. 난 외톨이로 살아왔다는 것. 그래서 결핍이 있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천성인 것 같다. 혼자 있으면 고독하다. 하지만 딱히 그건 나쁜 기분이 아니다. 원래부터 그랬구나 하고 요즘에서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다. 내가 영화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무수한 지난 시간들이 내게 어떤 식으로 채워졌을까?
2015년 5월 24일
지금 내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체 왜?
원인 1. ppt를 완성하지 못했다.
원인 2. 이번 달 피칭 아이템이 만족스럽지 못하다.
원인 3. 만족스러운 가운데 최선을 뽑아냈는가에 대한 의문이 계속 든다. (좀 더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1번은 2, 3번에서 기인한 문제다. 계속 아이템을 의심하고 있으니까 확신이 없으니까 만드는 것도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이다. 이건 물리적인 거라 그냥 만들면 되는 것. 그러니까 문제가 안되고. 원인 2. 사실 아이템 자체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인 3. 아이템은 나쁘지 않으나 준비가 부족한 것 같다. 여기서 플러스. 준비가 하기 싫다. 이 딜레마 및 단순하게 일하기 싫음에서 오는 저항감일까? 즉 정리하면 열심히 준비하고 싫고, 대충 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이고 스스로 만족도 안 되는 것. 이것이 마음속에서 계속 다투고 있는 것. 대충 할래 vs 대충 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해결책. 고민을 많이 한 아이템은 준비가 잘 되었던 것 같고, 그다음 아이템은 꾸역꾸역 완성은 했고, 하나가 남았는데 이것도 2번처럼 하긴 힘이 달리고 시간이 부족하니 그냥 가볍게 가보자.
2015년 6월 1일
모니터링 피드백. '캐스팅 의견 참 정확하게 잘 썼다. 네가 보내준 의견 다 읽었는데 잘 썼다. 쏙쏙 이해되게 정말 잘 정리해서 줬네. 고맙다. 제작투자회의 최선을 다해서 해봐야겠네.' 빈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이 참 뿌듯하고 감사하다. 다시 한번 내가 성장했다는 걸 느낀다. 벌써 6월이다. 올해도 내가 만족할 만한 성과가 있길 바란다.
작년에는 취직과 회사 적응이라는 성과가 있었다면 올해는 적응한 이 회사에서 성과가 있어야겠지. 시놉 3개 완성했다. 이때까지. 이제 내 담당 프로젝트 안에서 시놉 3개 더 완성하자.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그저 따라오는 것. 지금의 내게 중요한 것은 결코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그걸 잊어버리고 페이스를 잃으면 안 된다. 일단 보장된 성과 하나, 모 작가님과 파트너십 경험. 지금까지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이 기세를 이어가자. 이번 달의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 해야 하는 업무에 숨이 막혀오겠지만, 틈틈이 감성도 채우고, 생각하고, 호기심도 가져야 한다. 묵힌 책들을 모조리 읽자. 행동반경을 넓혀 새로운 것을 보자. 회사 업무는 늘 냉정하게, 관계 역시. 불가원, 불가근.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 비롯된다.
가족들이 다 같이 볼 수 있는 재미있고 즐거운 영화가 이 회사가 하고 싶은 영화다. 유쾌하고 골 때리는 아이러니가 있고.
2015년 6월 16일
밝고 강렬한 색채의 끝은 어둠, 빛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우주 속을 유영하고 잇는 듯한 고요한 색의 끝. 그곳은 영혼, 정신이 유일하게 머무는 곳이며 의식과 이성이 아닌, 오로지 감정, 온갖 지상의 것들이 뒤섞여 찾아온 침묵만이 존재한다. 인간의 아우성이 모인 소음의 총집합이 침묵이라는 것은 지독한 아이러니다. 검은색. 그 안으로 한 없이 모든 의식과 감정이 색채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로스코 채플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장사꾼이었나 높은 예술적 성취였나. 그 어느 곳에도 가깝지 않아. 그 중도에 서서 끊임없이 헤매고 있을 뿐이다. 고통스러워하며. 배가 곯는 건 싫어. 내가 초라해지지 않을 만큼 돈이 필요해. 하지만 내가 만들고 있는 것, 내가 속해있는 곳이 천박한 것을 견디지 못해. 이도저도 아닌 것 가운데 난 아무것도 만족스럽게 이룩하지 못하고, 나이가 들고, 그대로 스러져갈 것 같다. 이렇게라면 앞으로 반드시 고통스럽다. 그건 싫다. 정말 한심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용기도 없다. 그저 살기 위해서만 살아 있다. 시끄러운 돼지들이 꽥꽥 대는 걸 듣고 있다. 그곳을 박차고 나가면 될 텐데, 그저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 천박함에 물들고 있다. 이상하다. 이곳의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에 그렇게도 목을 매면서 개인의 개성을 짓밟는다. 폭력적인 자본주의의 최측근에 선 영화.
2015년 6월 18일
일을 계속하면서 드는 고민. 내가 피디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냉정하지도 않고, 작품을 바라보기보단 빠져있게 된다. 그리고 빠져있고 싶다. 그러길 나 스스로가 바라고 있다. 그렇다면 난 어떤 것에 빠져있고 싶은 걸까. 어떤 것을 이 두 손으로 만들어 내고 싶은 걸까.
2015년 6월 21일
이번에는 정말 내가 가진 능력과 배운 것들을 십분 활용해서 써보고 싶다. 그리고 물론 과정은 힘들겠지만 재미있을 것 같고 두근두근하다. 이런 일을 하고 있어 정말 다행이다. 감사하며 내일부터 잘 써보자. 아이템의 장점인 설정과 톤 앤 매너를 사람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당분간은 이거 하나에 매진해서 결과를 내고 스스로 확인하자. 한 달간은. 더 확보한 한 달간 꼭 완성하자. 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매주 부지런히 쓰자.
2015년 6월 29일
자신이 뭔지 모를수록 이기는 것에 초조해하고 뭔가를 원하는 것. - <핑퐁>, 마츠모토 타이요
2015년 7월 16일
남은 학자금을 계산해 봤을 때, 아무리 더럽고 연봉이 안 올라도 최소 내년 6월까진 다녀야 한다. 내 자존감에 아무리 위협이 오더라도 현실적으로 그만둘 방법이 없다. 이직도 경력이 애매해서 안 되겠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 나의 노력들이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 같고 아무런 것도 아니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회사가 나를 그렇게 만든다. 내가 아무 존재가 아니라는 걸 계속 상기시킨다. 회사가, 대표가, 사회가. 내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다. 너는 고작 그 정도라며 끊임없이 내리누른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만큼 사람을 끌어내리는 말이 있을까.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금방 대체 가능하고, 싼 값에, 멋대로 다뤄질 수 있다. 고작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기 때문에. 내가 대체 언제까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여야 하는지. 벌써 2년 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대체 언제까지여야 하는지.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고 그게 당연하다며 강요당하는 현실에 좌절한다. 대체자, 그림자, 고스트, 더러운 일만 도맡아서 하는 자.
정돈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제 패닉이 된 건 이 상황에 대해 몸으로 느끼고 진심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내 눈물은 내 몸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리보다 먼저 마음이 반응했다는 것.
마지막일지도 몰라서 내가 쓴 글을 사람들 모두에게 전송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너무 감정에 휩쓸렸던 건 아닌가 우려가 된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보자. 그리고 물어보자. 내 장점이 무엇인지, 내 경쟁력이 무엇인지. 코멘트의 취사선택은 내 몫.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어보면 내게 분명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후려치기 당하지 말자. 비록 세상에 내게 그럴지라도 나만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자. 내 목소리를 내자.
나는 피디님께 도움받아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내 아이템의 재미를 인정받았다. 나는 내 생각이 특별함을 인정받았다. 눈에 보이는 능력은 아니나, 이렇게 사람들의 평가와 인식이 켜켜이 쌓여서 다음을 향한 길을 만들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며, 내 노력과, 내가 해왔던 일들이 의미가 분명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자. 나는 언젠가 사람들에게 없어선 안될 존재가 될 것이다. 대체 가능한 사람이 아닌, 대체 불가능한 특별한 사람이 될 것이며, 그에 따른 합당한 대우를 받고 그 대우로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임금은 내가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사람으로 인식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지표다. 돈 때문에 일하는 건 아니지 않냐고, 이것밖에 못주지만 넌 중요한 사람이란 말은 허상이고 궤변이다. 내가 정말 그런 존재라면 임금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의 노동과 인간성이다.
2015년 7월 19일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해 그런 정신상태로 읽을 수 있을만한 소설 '좀비'를 읽었다. 이제 코스모스를 읽어야지. 다 짜증 나서 고칠 마음도 안 든다. 내가 닳고 있다. 점점 소멸되어가고 있는 느낌. 다 사라지지 않고 저항감을 느끼고 있는 건, 남은 내 개성이겠지. 모르겠다. 과연 내가 사회에서, 이 삶에서 어떻게 나를 욱여넣고 재단해야 하는지. 포기하고 싶은 마음뿐. 그런데 그는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내가 통과를 못 시킨다고? 내가 잘 하든 못하든 리액션, 피드백은 똑같은데 대체 뭘 애써서 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정상적인 세계에 맞추기 위해서는 비정상이 되어야 하나. 나는 나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를 지키고 싶다.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불만이 한가득. 좌절이 한가득. 허무함이 한가득. 아픔, 슬픔이 한가득. 모든 것이 허무하다. 하나로 얽히지 않는다.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 온통 흩어져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미래보다, 상상할 수 없는 미래에 가치를 두고 몸을 던질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나리오 초고, 각색고, 연봉협상, 2년 경력. 그 정도만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욕심은 버리고 최선만 다하자. 그 이상은 무리다. 그 이상. 아무리 뾰족한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멈춰야 할 시기다. 준비를 하자. 차근차근 쌓아가자.
2015년 7월 27일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재미있다. 생각만큼 잘 풀리진 않지만, 다 과정이겠거니 한다. 절대 조바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지만. 언젠간, 하고 다짐한다. 하지만 언젠가를 위해 지금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할지는 솔직히 아직도 감이 오지 않는다. 일주일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주어진 일을 하는 것도 분명 미래를 향한 길이겠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느낌이다. 내가 뭘 해야 할까. 그동안 무엇을 준비해야 하나. 소설을 쓰든, 대학원을 가든, 시나리오를 쓰든. 중요한 건 '아이템'이다. 내 아이템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드는 생각은 아이템을 만들고 1년 간 발전시키는 것이다.
소설 강의를 통해 아이템을 발굴하고 이를 영화화하는 것도 방법 중에 하나일 것 같다. 사실 겁이 나기도 한다. 회사일을 하면서 해낼 수 있을까. 장편은 무섭다. 한 번도 써보지 않았다. 다음 주부터 시놉 3차 수정 들어가야 하니 이번 주 내로 아이데이션이나 기획방향 다시 잡을 것. 꼭!
2015년 8월 6일
아이디어 작업이 제일 고되다. 일이 진행되어 가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도 헷갈린다. 노트에 끊임없이 끄적대는 거라서 집중도 잘 안된다. 이 순간 나의 마음가짐을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해결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산더미다. 이걸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단계적으로 차분히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나가야 한다. 진득이 앉아서 고민을 해야 한다. 쓰기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다. 항상 주의하는 부분이다. 충분히 고민하고 차분히 짚고 넘어가자.
2015년 8월 7일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것 같다. 결론은 현재진행형으로 가야 할 것. 대신 미래를 준비할 것. 힘을 분배하자. 회사란 것이 내 뜻에 맞게 움직이는 곳이 아니니까 애처럼 굴지말자. 흔들린다. 이리저리.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치열하게.
2015년 8월 10일
이제껏 과정을 중요시했다고 과정을 통해서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의미가 없다. 더 이상 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내 손으로 하지 않은 것, 그 빈약함에 그 허무함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다. 진짜가 되고 싶다.
2015년 8월 13일
흔들리는 20대. 마지막 20대. 도망치는 것도 안되고,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는, 불안한 벼랑 끝의 느낌. 그만 결정을 해야 하나. 지난밤, 그들과의 대화는 내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모두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달의 뒷면을 본 것 같은 느낌. 연출은, 영화감독은, 대학원은 포기하고 싶어. 아니 선택하고 싶지 않아. 어쩌면 도피처였는지도 모르지. 여전히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고 믿고 싶은, 신기루 같은 것. 아직도 난 특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위안하고 싶은 그런 나약한 마음. 몇 년도 가지 않는 단말마의 욕망. 그렇기에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대학시절의 반복. 또 다른 형상. 회사를 다니되, 글을 쓰는 일을 하자. 소설을 쓰자. 내 이야기를 하자. 견디자. 조금은 무던하게, 무디게. 이 회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니 풀 죽을 필요도 없고 내 의미는 내 삶의 의미는 일에 있지 않고, 퇴근 후의, 주말의 내 생활에 있다는 것. 아마추어의 취미와 프로를 지향하는 일을 해내자. 사람들에게 상냥하게 하고.
2015년 8월 18일
내가 조각조각 분열된 것만 같다.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고 하나하나, 조각조각. 이 때문에 그 빈틈으로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내린다.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흩어진다. 집중해야 해. 떨어져선 안돼. 그렇게 타이르는 대도. 긴장감도 느슨해져 간다. 온몸을 웅크려 달려 나가려다가도 시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항상. 그게 잘 안된다. 생각에, 자신이 정한 명제에 갇혀버린다. 그 안에서 허우적댄다. 구조란 것이 주물 틀을 붙이듯이 생각하면 안 되는데, 그것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무시하고서라도 설득할 능력도 없어서 늘 빙글빙글 맴돌 뿐이다. 그게 현 단계에 있는 내가 스스로에게 가장 답답해하는 부분. 늘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건 원점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자. 그건 원점이 아닌 나선이라고. 한 바퀴 돌았기에 같은 풍경이 또 보이지만 사실은 앞으로 나아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또 실제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로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모두들. 지금 당장 사라져 버리고 싶지만. 사라져서는 안 되는 누군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꿈꾸며.
2015년 9월 10일
노력했던 일이 보상받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빈말이 아니었던 것도 알고, 내가 노력했던 것도 안다. 큰 보람이라기보단 이제야 밥값을 했다는 느낌? 정말 고민하고 노력했던 건 사실이다. 그것도 내게 무척이나 유의미한 방식으로. 메인 프로젝트 작업도 내게 많은 도움이 된다. 작가님이 우리를 설득하는 방식과 아이디어를 내는 방법, 언어, 생각, 그 모든 것이.
2015년 10월 1일
모든 긴장과 불안의 원인은 두려움 때문이다. 시간을 못 맞출 거라는 두려움, 말을 잘 못할 거라는 두려움. 사람들이 지루해할 거라는 두려움. 사실 이제와서는 성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내 두려움은 항상 과정에 있다. 뭐가 무서운가. 내가 4월부터 최선을 다한 일인데. 매듭을 지을 뿐이다. 그저, 차분하게, 고요하게, 성급해하지 않고 나갈 뿐. 떳떳하게 할 일을 할 뿐이다. 가짜 같은 이야기를 하려면 진짜 같은 것을 박아놔야 한다. 집요함이 필요하다. 집중력과 집요함.
2015년 10월 모일.
어떤 묘한 긴장 상태를 느끼고 있다. 여름의 방만한 나날들로 얻은 병마와 같은 지방이 축적되었고, 내 몸뚱이는 바뀐 계절 옷을 집어삼키고 있다. 내가 걸을 때마다 뒤룩뒤룩, 내 살들이 스치는 소리가 시끄럽다. 오래 앉아 작업하기도 괴로워졌다. 그래도 술이 계속 먹고 싶다. 힘들면 힘든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마치 그 한 잔이 그날의 기도나 축제라도 되는 양. 하루의 마침표를 술로 대신했다. 가진 것은 없으면서 눈은 높아지고, 입은 비싸지고, 생각은 많아진다. 종종 스스로가 오물 같다는 생각에 역겹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소설을 쓰고 싶다. 쓰고 싶다, 쓰고 싶다 하면서 왜 쓰지를 못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지난 내 이야기를 정돈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습작으로 쓰면 될 일이다. 망설일 틈도 없고, 넋 놓을 틈도 없다. 글쓰기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 영화 일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많이 보고 많이 쓰는 것. 분명 내가 다음 단계로 진전할 수 있게 된 일은 기쁜 일이다. 나의 어떤 한계치를 넘어섰다는 생각도 들고. 너무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적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이 아니라, 나선계단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에 있다. 그것이 내가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다. 결과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 두 발로 꾸준히 걸어서 계속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은 것이다. 절대 고여있고 싶지 않다.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라서도 있지만. 슬슬 나 자신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에서 어떤 성과가 의미가 아닌, 인생 자체가 우리 인간의 삶의 의미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나는 이 일을 하는 내 모습도, 이 일 외에 내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도,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둘 다 놓치고 싶지 않다. 현재로서는. 그래서 앞으로 더 바빠질는지도 모르겠다. 견디기로 했다. 견디면 시간은 흐른다. 시간이 흐르면 필연적으로 일은 끝나고, 그 끝에 층계를 더 올라간 내가 있다. 나선 계단을 올라간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다. 최상층엔 결국 내 존재의 몰락, 죽음 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주어진 시간 동안에 더 많은 것을 보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싶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가 내게 즐거움이니까.
2015년 11월 4일
피디님들께 더 이상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자. 사실 그들과의 관계는 14년에 끝났다. 같은 곳에 일하지 않는다는 것과 내가 그들에게 이용가치가 크지 않다 즉 give가 없다는 것은 관계의 긴장감을 떨어트린다. 사회에서 만난 관계이므로 어쩔 수 없이 득실이 개입한다. 더 힘을 키워야겠다.
몇 개의 아이템을 통과시키더라도 계속 다음단계가 있는 한, 일에 있어서 '행복'이라던가,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자. 밥그릇일 뿐. 어찌 되든 먹고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일적으로 내가 한 일이 곧 내 몸값이지만, 그 돈 값 했으면 됐지, 그것이 내 존재의의와 결코 연결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명심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최선을 다할 것. 떳떳할 수 있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그 원칙만 지키자.
2015년 11월 23일
관록보단 센스나 똘끼가 더 중요한 프로젝트인지도 모른다. 점점 더 오기가 생긴다. 다들 마냥 생각하는 그 이야기를 가지고 발목을 건다. 코미디는 이제 경쟁력 없는 것 아니냐고.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잘 만든 코미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코미디라서 우습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2015년 11월 25일
나보다 나이가 훌쩍 많은 사람들도 올드하고 식상하다고 느끼는데 과연 요즘 관객들이 이 기획에 관심을 가질까 의문이다. 더군다나 관심 있는 배우가 나오지도 않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일단 나 스스로가 다시 점검을 해보고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 어떤 점이 문제이면 그 해결에 대한 고민을 해야지. 기획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접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어쨌든 시나리오 작업은 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모든 고민은 내가 과도기적 시기에 있다는데서 기인한다. 내 능력, 장래, 모두 애매하다. 결국 그래서 계속 영화계에 있을 건지 아닌지, 그 안에서 피디, 감독, 작가.. 그 밖에서 소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에 내 능력 개발 초점을 맞춰야 할지 계속 흔들리고 멈추어있고 번민한다.
2015년 11월 27일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하고. 내 일이라는 것이 명료한 일이었다면 좋았을 거 같다. 시놉시스 단계를 넘어서 진행되는 일은 책임감이 더 무겁고, 그래서 퇴근 후에도 내 마음속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점점 나이가 들고 성장할수록 이 묵직함은 더 무게를 더해가겠지? 과연 이 감각이 내 현재에 버거운 것일까, 할만한 것일까. 어쨌든 이 무게를 지금 경험해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잘못되거나 잘 되지 않았을 경우의 비난과 책임을 지는 자리란 건 사실 쉽게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거니와 기꺼이 빠져보기로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
기획이란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내가 맡은 이 기획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다. 미래를 볼 수 있을 만큼 좋은 기획도 아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기획과,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기성작가의 경우, 기회비용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당연하다. 그들은 프로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제작가능성이 작업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어쩌면 돈보다, 어쩌면 기획이나 이야기의 재미만큼. 그래서 기성작가를 고용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아주 많이 어려울 것 같다.
2015년 12월 9일
너무 걱정하고 긴장하지 말자. 이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나 역시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늘 시작이 어려운 것. 이 프로젝트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통과된 이상 회사의 프로젝트다. 나는 그 다리역할일 뿐. 내 뒤에는 회사가 있다. 나는 담당자일 뿐이다. 프로젝트에 대한 애정이 깊은 담당자. Y피디님께서 늘 내게 해주셨던 말. 어딜 가든 당당하고 떳떳하게!
2015년 12월 18일
지금 나는 마치 영업사원 혹은 보험영업 사원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런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내 기준을 정했다. 1월까지는 계약완료를 목표로 두고, 남은 12월에 최소 1명 이상에게 컨택하는 걸로. 미팅일은 1월로 넘어가도 상관없으니. 기획영화이기 때문에 초고 작업은 아무래도 이름 있는 작가가 필요한 건 맞다. 그러니 이사님 말대로 좀 더 찾아보자. 주말 내로 내 나름의 후보를 추리고, 월요일에 피디님께 상의드리고 연락처 구한 다음에 다음 주중 컨택하는 것으로.
2015년 12월 19일
확실히 요즘의 나는 이상하다. 뭘 해도 잠깐 재미있을 뿐 지나고 나면 우울하고 허무하다. 모든 것들이 미래와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내 인생에서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혼자 있는 것이 따분하게 느껴지는 한편 무척이나 혼자 있고 싶기도 하다.그래도 제일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은 혼자 있는 일이며 가장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하다 느끼는 곳은 집이다.
더 이상 뒤처지는 것이 싫어서 발버둥 쳐왔다. 12년, 13년, 10년 그리고 15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나 자신도 꽤 많이 변해왔다. 이젠 그저 주어진 일만 하면 누구에게 신세를 지거나 집에 돈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게서 구태의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물이 고이고 있다.
그리고 그 물은 결국 흘러갈 곳을 찾지 못한 채로 썩어갈 것만 같다. 그래서는 안돼. 멈춰있는 것보단 계속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 다리가 향한 곳이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었다면.. 어쩌지? 내년에는 홀러 갈 곳에 대해 내 나름대로의 결과와 결론을 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도대체 뭐지. 이제는 정말 글을 쓰고 싶다. 짧은 단상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단편소설을 쓰자.
2015년 12월 28일
약한 소리도 많이 하고 스스로 탓하고 누군가를 원망하고 잠도 못 자고 괴로워했지만 결국 일은 나 하기 나름이고 부탁하기 아쉬운 소리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도움받은 만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보답하면 되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말자. 내가 그동안 해온 일들이, 만나온 사람들이, 살아온 삶이 결코 헛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기를 내자. 좋은 기회 앞에서 자꾸 안 하느니 못하다는 약한 소리는 그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일 뿐이다.
커버 사진
엘리아 카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