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2015 From 2023
2023년 10월에서 2015년의 너에게 보낸다.
얼마 전에 대본 4화 수정고가 나왔다.
아마 너는 아직 70~100페이지 사이의 영화 시나리오의 구조를 생각하며 고군분투하고 있겠지.
대본을 작가에게 받아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더라?
어떻게 영화 이상의 분량, 인물, 그리고 전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더라?
대본은 점점 다른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어주고 있는데, 나는 점점 재미가 없어진다.
벌써 2년째 바라보고 있으니까. 한 화, 한 화가 고비다.
이 길이 맞는지, 저 길이 맞는지. 끊임없이 이리저리 걷고 있으니 재미없을 법도 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만든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 길의 시작은 아마도 그때의 너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기회가 있었지. 아주 큰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넌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어.
일을 시작한 것이 기획팀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기획으로 무언가를 해보지도 못하고 제작 파트로 가고 싶지 않았어. 먼저 네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길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거였지. 일견 화려할 수 있는 필모그래피를 포기했다. 큰 고민이 없었던 선택이었지만 그때가 시작이었지.
그 어디에서도 나설 수 없는 고스트의 길이 시작되었어.
기획 파트는 그런 곳이었어. 기획이란 크레딧은 가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
혹은 빛나는 자리를 약속받은 자만 가질 수 있었고,
그 일을 함께 해나가는 인력들은 기적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져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고,
아예 이름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당연히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였고.
신입 피디들도 한 명의 피디로 대우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선언 혹은 또 다른 기회가 생겼어.
하지만 보수는 그렇지 못했어. 정규직 초봉 2천만 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감수하라는 말을 들으며 그 후에도 오르지 않았던 급여에서 사실은 답이 있었던 거야.
계획도 없고 실체도 없는 허울뿐인 기회였다는 것이라는 사실.
그래도 그 기회에 매달렸어.
사실 아무도 너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매달렸어. 최선을 다했어.
그렇게 안 되는 일에 매달렸던 이유는 정말 단순했어.
설령 허상이라도 주어진 것들을 이용해 유의미한 경험을 쌓고 싶었어.
그래서 참여하는 메인 프로젝트 외에도 단독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 위해
너는 홀로 이야기를 개발하고 시놉시스를 쓰고, 또 고쳐 썼지.
목표는 단 하나. 기획으로 시작된 단독 프로젝트로 작가를 고용해 시나리오 작업을 해보는 것.
여러 번 실패했지. 회사의 의견에 가로막히고, 스스로 개발에 좌절하고,
결국 다음 진행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드롭되고 작업이 중단되기에 이르렀지만 괜찮았어.
왜냐하면 계속 아이템을 제안할 수 있는 시스템은 존재하여, 다음 아이템을 준비하면 되었거든.
그리고 사실 너는 알고 있었어. 네가 진행하는 아이템들이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때 너를 좌절시켰던 것은 오히려 회사에 제안하는 아이템에 스스로의 영혼을 담을 수 없다는 점이었지.
애초에 피디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나는 창작자로서의 일부를 버렸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용광로에 뛰어들어 그 모든 걸 없애겠다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래서 필연적으로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었지. 상업 영화에. 피디란 직업에.
고스트, 대체자, 그림자, 더러운 일만 도맡아서 하는 자.
네가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이유를 알아.
만약 네가 그때 피디도 아티스트가 될 수 있고,
그 누구보다도 작품의 코어에 가장 닿아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그럴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면 너의 아픔이 조금은 덜 했을까?
영화뿐만 아니라 다른 매체로의 가능성이 있는 시대가 올 거라고 말해주었다면
그 방황이 조금은 덜 했을까?
그래 알아.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단편 영화보다는 오히려 글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해 준 사람들이 있었던 학창 시절이 있었기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 글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하지만 결국 소설도 제대로 써내지 못했고, 회사 일에만 집중했지. 오락가락했던 것 같아.
한계를 알고 있으니 절망하면서도, 진행하는 일 자체는 재미가 있었던 거야.
그때 한 피디님이 너에게 조언을 해주었지. 갖춰지기 전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자신의 작품을 하려면, 스스로의 능력은 물론 환경도 갖춰져야 하는 거니까.
물론 너는 듣기 싫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지금 당장이 너무 힘들고 참을 수가 없다고.
지금의 내가 해줄 수 있는 말도 크게 다르진 않아.
다만 조언을 해주신 피디님보다 솔직하게 말해줄 수는 있어.
버티고 참는다고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진 않아. 아무리 노력하고 인내한다 해도, 인생이 그것을 모두 다 보답해주진 않더라고. 오히려 우연의 요소로 크게 좌우되는 것이 인생이니까. 다만, 멈추지 않아야 해.
'죽었다 셈 치고 버티고 참아라'가 아니라 '생각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기'를 참아내고 버틸 것.
아무 생각 없이, 혹은 불평불만만 하면서 참아내면 남는 것이 없고 세월은 흘러가 버리니.
끊임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한 바를 시도해 보는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
그것만이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스스로에게서, 또 너무도 불합리한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갖춘' 세상으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
커버 사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