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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 Jun 02. 2024

단 한 번도 친구와 제대로 싸운 적이 없는 아이

2. 기획 - 관계

기획
企劃

'나도 그런 생각했었는데!'

누구나 이런 생각 혹은 말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종종 하는 편이고, 누군가 내게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아니 모 배우, 그때 내가 캐스팅 리스트에 올렸는데 다들 누구냐고 빼라고 했잖아."

화제성을 올킬한 신드롬급 화제작의 주연 배우는 이제 천상계로 향하고 말았다. 나는 그를 진즉에 알아봤었다며 짐짓 억울하다는 듯 농을 쳤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기획이란 실현이라는 것을.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생각만 하고 안 했잖아. 했어도 그렇게 터졌을까?'

그래서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실현시키지 못한 나에게 던지는 일종의 자학개그.


기획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심플하다. 두 가지. 돈과 사람이다. 스터디에서 기획의 한자부터 공부했다. 기획에서 '획'이란 글자를 보면 그림과 밭과 칼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칼이라고 했다. 즉 다시 정리하자면 기획자는 돈과 사람을 쓰는 사람인 것이다. 

  

최근의 작품을 놓고 다시 생각해 보면 나는 대본을 기획/개발하는 비용은 회사에서 투자를 받았고, '작가'라는 사람과 함께 진행했다. 하지만 이 기획을 제작하는 투자/편성은 받지 못했다. 소재나 대본이 어필되지 못했고, 제작 결정에 큰 요소인 '배우'와 '감독'이 빠져 있었다. 기획이 현재 실현되지 못한 이유는 명백하게 투자를 받지 못해서다. 투자를 받지 못하게 된 이유는? 결국 하나로 좁혀졌다. 사람을 쓰지 못했다. 


'어릴 적에 놀이터에서 너는 어떻게 놀던 아이였어?'  

스터디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관계의 대다수 문제는 놀이터에서 해결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얼음땡도 그냥 얼음땡이 아닌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하거나 정글짐 위에서 했던 나. 엄마가 저녁을 먹으라고 애타게 부르다 못해 쫓아 나올 때까지 이 골목 저 골목을 들쑤시고 다녔던 나. 항상 친구들을 즐겁게 해 주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모두를 화합하는 공평한 반장 타입이 아니라, 자아와 주장이 뚜렷하다 보니 나에게 끌리는 친구들과 함께 노는 그룹장 타입이었다. 


보통은 잘 맞는 친구들끼리 놀다가 간혹 다 함께 놀게 되었을 때 어떤 친구가 느려서 따라오지 못하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왜 말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늘 저렇게 흐리는지 짜증이 났던 기억이 난다. 휙 하고 돌면 그만인 낮은 철봉을 왜 겁내면서 한 바퀴 돌지 못하는지 이해를 못 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갈지 말지, 뭔가를 결정할 때도 저렇게 한참 생각하는 건가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것. 나와 맞는 사람들과 깊어지는 것. 내가 생각하는 기준치에 미치지 못하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 이러한 면은 현재까지도 내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때 놀이터에서 배웠어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고 싶은 친구들이랑만 놀고, 나랑 다른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을까? 그런 면이 지금까지 문제였던가? 주말 동안 생각해 본 결과, 찾아냈다. 문제는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나는 놀기 싫은 아이에게, 너랑 놀기 싫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친구에게, 제대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왜 그런 거냐고 물어본 적이 없었다. 


진실을 말하면 못된 애가 될까 봐.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인기를 잃을까 봐. 관계가 무너질까 봐. 교실 안의 생활이 불편해질까 봐. 대가족이 사는 집안에 사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생존형 눈치가 기본 장착되어 있어 기민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친구와 제대로 싸운 적이 없는 아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한 친구에 대한 불만을 꾹꾹 눌러 담다가 일을 같이 한 것을 계기로 크게 터져서 연을 끊게 되거나, 누군가 스스로 깨부수고 나아가야 하는 몫의 일을 내가 감당하면서 결과물의 질을 떨어트리고, 나의 역할은 그런 거라고 받아주다 보니 아예 드러누워버리는 사람에게 참다 참다 한 마디 했다가 별안간 몹쓸 년이 되거나, 자유와 방임이라는 애매한 선을 타고 있는 대표에게 단호한 지원 요청을 하지도 못했다. 힘을 합해야 하는 레이블 담당이 똥볼을 차고 있는 것을 멍청히 보고만 있어야 했고, 캐스팅 디렉터가 대본은 재미있는데 왜 캐스팅이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을 듣고만 있어야 했다. 


화가 나서 잠이 안 오는 날도 많았다. 쌍욕이 절로 나오는데도 이성적으로, 부드럽고, 우아하게 표현하려고 최대한 참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조마조마한 환경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주는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꿈꿨다. 얼핏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물론 이 놀이터에서 시작된 문제가 기획 실패의 이유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경험 미숙이라는 요소가 크게 작용했다. 단계마다, 관계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이끌어 가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아직 부족했던 것이다. 


무조건 육식하는 맹수 중에 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 달아나는 사슴이었던 건에 대하여... 

정말 울고 싶은 밤이지만 이걸 깨닫고 마주한 것에 대해 칭찬해 주기로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봐야겠지만, 

당장 내일 미팅에서부터 구리면 구리다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 




커버 사진

영화 <스탠 바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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