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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알아본다는 것, 그 세계를 지켜본다는 것

Chapter 2. Project green

by 플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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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레드가 내가 제안한 아이템으로 신인 작가와 함께한 작업이었다면, 프로젝트 그린은 베테랑 작가가 제안한 아이템으로 회사가 계약하여 내게 맡긴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계약한 아이템은 현시대의 관심사와는 계속 어긋났고, 유사한 소재의 유명 웹툰 원작이 있는 것도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작가가 자신 있어하는 아이템을 정작 작가 본인이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데 있었다. 대본은 계속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나는 작가에게 기획 방향 두 가지를 제안하며 명확한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작가는 피디가 기획에 관여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겼고, 나는 작가의 결과물을 만족하지 못하는 회사와 피디의 개입을 꺼리는 작가 양쪽을 조율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막 계약한 작가와 당장 갈라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의 삶이 흘러가는 것을 마냥 방관한 채 두고 볼 수도 없었다. 나는 작가에게 잘 맞는 아이템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작가에게 가장 잘 맞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아이템은 따로 있었다. 계약 직전에 작가가 작업한 다수의 대본을 검토했는데 그때 유독 내 눈에 들어온 작품이었다.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으로, 독특한 소재는 물론 복수를 꿈꾸는 독한 소녀와 소년의 지독한 사랑이 강렬하게 다가온 작품이었다. 이런저런 아이템을 시도해 본 끝에 조심스럽게 사극 아이템을 드라마로 진행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 시기는 회사에 다닌 지 2년이 지난 시점으로 내 직감을 믿기 시작한 때였다. 회사도, 심지어 작가조차도 관심이 없던 아이템을 진행하는 것이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이템을 바꾸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가 살아온 시간대와 언어가 달라서 종종 부딪히거나 침묵하곤 했지만 우리는 서서히 관계의 중심을 잡기 시작했다. 오로지 작품을 잘 만들어보자는 마음 하나에서 시작된 무게 중심이었다.


아무리 베테랑이라도, 새로운 작품 앞에서는 누구나 처음으로 돌아간다. 작가가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고 구축할 수 있게 기획자는 비즈니스적으로 설득이 되는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해 주고,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 결과 작가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끝까지 지지해야 한다. 기획자는 작가를 따르고 돕는 서포터도 아니고, 강력하게 통제하는 독재자도 아니다. 냉철하게 경계를 짚어주고 강렬하게 지지하는 소울메이트여야 한다. 이것이 프로젝트 그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내린 기획자의 정의였다.


1년 간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배웠다. 기획자가 그리는 명확한 그림 안에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은 자기 재질에 맞는 일을 할 때 빛이 나고, 기획자는 그 자리와 재질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베테랑은 잘 고치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결국 프로젝트 그린은 처음의 불협화음을 딛고, 제작이 불가능한 영역에서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완성도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작가는 마음을 열고 나를 든든한 파트너로 인정해 주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하는 일은 서로가 서로를 먼저 알아봐 주길 바라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본 서로가 하나의 세계를 함께 완성해 가는 것. 그중에서도, 누군가를 먼저 알아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획자의 일의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쉬움은 남는다. 프로젝트 레드에 이어 이번에도 내가 그리던 세계를 끝내 구현하지는 못했고, 내가 가진 패의 한계로 또다시 상품적 가치에 의문이 남는 기획이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작가의 세계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기획자로서 내가 얼마나 더 단단해져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작가, 아이템, 시장과 상품 가치의 매칭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그 조합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부딪혀보는 일, 그 자체가 기획자의 길이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실패든 성공이든 이 여정을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품이 언젠가 꼭 세상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과 사랑으로 떠나보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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