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Project yellow
프로젝트 옐로는 프로젝트 레드와 마찬가지로 입사 초기 맡은 작품이었다. 공동제작사가 개발한 소설 기반의 판타지 액션 활극으로 처음 기획안을 보았을 때는 의문이 많은 기획이었다. 소재는 흥미롭지만, 캐릭터가 빈약하고 전체적인 방향성도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킥오프 미팅에서 내가 받은 자료는 소설의 기획안일 뿐이며, 드라마화는 새로운 방향성으로 나아가자는 논의를 거친 후에 가능성을 보고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프로젝트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건 기획안을 완성하고 작가진이 합류한 이후부터였다. 공동제작사의 대표와 피디, 작가 두 명, 그리고 나. 총 다섯 명이 한 팀을 이루어 1년 넘는 시간 동안 정기적인 회의를 통해 함께 대본과 기획안을 개발했다. 컨셉아트 작업과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와의 협업까지 병행하며 프로젝트는 폭넓게 확장됐다.
우리 팀은 처음부터 잘 맞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연령대도, 취향도, 성격도 달랐다. 의견 충돌도 빈번했고, 회의가 끝난 뒤 회식 자리에서 종종 다투기도 했다. 그런데도 돌아보면 그 시절은 참 즐거웠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작품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모두가 작품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회사와 함께 기획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하나의 팀이 되어본 것은 처음이었고, 공동제작사 대표님도 드문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런 팀워크가 가능했던 것은 우리가 작품만 생각하며 서로를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기획자로서 내 역할이 수평적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하나의 아이템이 회사와 회사, 서로 다른 형식을 넘나들었고 그 과정에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언어와 표현 방식이었다. 내가 속해 있는 업계에서 쓰는 언어로만 표현하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바가 온전히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서관, 서점, 웹을 종횡무진하며 자료조사를 하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전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자료를 정리하곤 했다. 비즈니스였지만 협업하는 모두가 이 판타지 세계를 애정으로 구현하기 위해 애썼고, 그 과정에서 파트너들은 내 감각과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영상에 국한되지 않는 하나의 매력적인 세계 즉, 원천 IP를 기획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기세 좋던 프로젝트는 어느 순간부터 꺾이기 시작했다. OTT 시장이 호황에서 불황으로 바뀌며, 당초 기획된 규모로는 제작이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기획 방향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건 모두가 동의했지만, 일정은 계속 지연됐고 공동제작사의 사정이 겹치면서 결과물은 좀처럼 소식이 없었다. 나는 어느새 일정을 기계적으로 체크하며 계속 뒤로 미뤄지는 날짜만 고치고 있었다.
사람을 모으는 것도 중요하고, 팀워크도 중요하지만, 진행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집중력이다. 기획자는 프로젝트의 흐름을 잡고, 계속해서 긴장감을 유지하며 끝까지 이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처음의 열정과 기세는 언젠가 소진된다. 그렇다면 그 시점에서 다시금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흐름을 만드는 것은 기획자의 몫이고 책임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인 공동제작사와 작가들이 충분히 주도해 줄 거라 믿었다. 내가 굳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더라도 프로젝트는 잘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복잡한 판타지 세계를 내가 기획자보다 잘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 회피와, 업계 선배들 앞에 나서서 충돌하고 갈등을 빚기 싫었던 두려움이 겹쳐졌던 것 같다. 동료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결국 나를 멈춰 서게 만들었고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뼈아픈 순간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참여한 시기의 성과로만 본다면 실패였다고 생각한다. 이 실패 덕분에 기획의 집중력과 긴장이 깨졌을 때 흐름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면서 기획자의 역할은 세계를 구상하는 것뿐 아니라, 그 세계를 현실로 끌고 나가기 위한 리듬과 속도를 설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획자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진다. 그러므로 기획자는 자신이 어떤 스타일의 기획자인지 어느 정도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파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프로듀서에게는 다양한 아이템과 작품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한 작품에 목숨을 걸 정도로 집중하고 몰입하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양을 늘려 리스크를 줄이는 것보다, 내 역량을 쏟아부을 만한 프로젝트를 기획에 집중하는 것이 내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이며, 프로젝트는 물론 내 삶을 위한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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