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Project purple
프로젝트 옐로가 공동제작사와 시작부터 함께한 프로젝트였다면, 프로젝트 퍼플은 공동제작사에서 대본까지 기획 개발을 끝내고 캐스팅을 진행하는 시점에 맡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엔 공동제작사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의 담당자였다. 그런데 캐스팅을 시작한 지 1년 가까이 된 시점에 유력한 배우가 작품을 놓으며 공동제작사 측은 이제 우리 회사가 주도적으로 캐스팅을 이끌어줬으면 한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나는 담당자에서 실질적인 진행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프로젝트를 이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프로젝트를 기획 개발해 온 사람들을 존중하는 입장이었고,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불필요한 주도권 갈등을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작품의 감독이 나와 미팅을 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다른 회사의 프로듀서가 담당자가 된 상황에서 감독이 불안감을 느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만난 자리였으나 미팅 후 생각이 바뀌었다. 오랜 시간 작품을 진행해 왔던 감독은 이 작품이 이제는 안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어떻게든 완성하고 싶다는 뜨거운 열망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오는 애타는 마음을 마주한 순간 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해야 할 일은 다시 프로젝트에 바람을 불어넣는 것, 그렇다면 나는 이 프로젝트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회사로부터 사직하라는 통보를 받기 전, 3개월 간 주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단 석 달뿐인 시간이었지만 이 프로젝트는 앞서 거쳐온 프로젝트만큼이나 깊은 각인을 남겼다. 내가 회사에서 거쳐온 모든 실패와 배움을 정리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레드에서는 기획자의 가장 본질적인 역할인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지 못했고, 그린에서는 작가의 맞는 재질을 알아보았으나 기획자의 세계를 구현하는 데 실패했다. 옐로에서는 프로젝트의 집중력을 이어가는 기획자의 책임을 방기 했다. 퍼플에 이르러서는 그 모든 과정을 되새기며 다르게 해보려 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잉걸불을 찾아 프로젝트의 코어를 다시 타오르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동력체가 되는 것이 그 첫 번째였으므로 나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스케줄을 주도적으로 짰고 파트너들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일을 맡겼으며, 불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을 덜어 속도를 높이고 에너지 손실을 막았다. 감독과는 캐릭터와 스토리, 대본을 동시에 수정하기로 결정하며 캐스팅과 수정 작업을 병행하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허락을 구하거나 의견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로지 기획자로서의 내 감각을 믿고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동력체가 된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다는 감정도 느꼈다. 데스크 앞에 앉아 구체적인 해결책 없이 그저 ‘되기만’을 바랄 뿐인 사람들이 최전선에서 싸우는 내게 지시하는 일들은 대체로 기획자인 나를 존중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 시간들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싸워서라도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없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누구에게나 유용한 쓸모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서 탈피하고 있었다. 이제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기보단 오히려 다른 사람을 믿어주고 지키는 사람으로 자립을 시작한 것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처음부터 모두를 믿긴 힘들었다. 수많은 결정 앞에서 나는 의심을 거듭했다.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일까 불안했다. 하지만 믿음이 배반당한다면 그건 그때 해결할 일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내 직감을 믿고 사람들을 믿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만난 지 고작 3개월 밖에 되지 않는 파트너들에게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믿음이 그들을 움직이게 했고 그들은 믿음으로 돌려주었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내가 불어넣고 싶었던 프로젝트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의 향방에 대해선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그렇게 프로젝트 퍼플을 마지막으로 회사와 작별했다. 내가 시작하진 않았지만 진심을 다해 지키고 싶었던 세계이자,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일이었다. 모든 세계를 거쳐 문을 닫고 나오며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결국, 나의 일은 사랑과 믿음이 전부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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