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너진 세계에서 배운 기획의 본질

Chapter 1. Project red

by 플리커
3.png

기획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오리지널 기획을 제안하는 것보다 회사의 프로젝트를 내 방식대로 풀어내거나 원작을 각색하는 일에 더 재미를 느껴왔다. 창작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고, 거리를 둔 채 방향을 세울 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피디로서 적절한 균형 감각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젝트 레드는 달랐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볍게 제안했던 기획이었고, 내가 중심이 되어 시작한 첫 프로젝트였다. 코로나로 인해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OTT의 확장이 본격화되던 시기, 영화 업계 출신인 나와 드라마 업계 출신인 친구가 힘을 합치면 신선하고 재미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간 영화업계에서는 만들 기회가 없었던 로맨스 장르를 기획하는 것도 기대되는 요소였다.


무엇보다 친구가 가져온 아이템은 ‘재미’ 있었다. 어릴 적 좋아했던 영화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였고, 판타지 로맨스 장르에 스릴러 요소가 있는 컨셉이 익숙하면서도 신선했다.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남자의 고독, 다시 만난 옛 연인과 지고한 사랑만이 절대 놓고 싶지 않은 그의 마지막 인간성이란 사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의 비애감. 이와 같은 인물의 깊은 감정선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명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기획이 ‘재미’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기획자인 내가 재미있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둘 함께하면서 결국 대중에게까지 연결되어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재미있고 매력적인 아이템일지라도 시장에서는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2년 동안 준비한 대본을 들고 채널 소싱 회의에 참석하는 날, 회의 직전에 기획부터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야기가 어둡고 비장했다고 했다. 본 회의에 들어가자 채널에서는 직전에 연달아 실패한 작품들과 유사한 요소가 있는 작품은 지양하고 싶다고 했다. 주말 8시 시간대에는 거실에서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을 원한다고 했다. 그때는 그저 우리에게 흥미로웠던 이야기가 지금 이 시기에 이 채널에서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나는 이 기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작품’을 ‘감상’한다고 하지 않고, ‘콘텐츠’를 ‘소비’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한 시대에 비즈니스 차원에서 본다면 제작비를 대고 배급하는 채널, 플랫폼, 투자배급사의 필요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상품 가치를 가진다. 캐스팅을 논외로 두고 그들이 판단하는 상품 가치는 상품의 질이 좋거나, 대중이 열광하게 될 매력보다는 기존 작품들의 성패와 화제성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 제작진들이 성공을 보장할 만큼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지도 가치 판단의 요소에 포함된다. 업계가 불황인 요즘은 그 판단이 보수적이고, 어떤 작품이 언제 터질지 모르기에 기준이 유동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내가 정의한 비즈니스 관점에서 좋은 아이템이란 합리적인 비용으로 꾸준한 수요가 있는 장르에서 신선함을 주는 이야기인 것이고, 좋은 기획이란 작품 패키징이 투자와 수익 구조에서 안정적인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다. 신인작가를 기용했다면 아이템은 시장에서 주로 거래되는 규모와 상품적 가치를 생각했어야 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 레드는 드라마적 관용과 영화적 욕심이 혼재되어 너무 많은 요소로 가득 차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설 자리는 없었고 마침내 나는 이 기획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획의 실패는 내가 작품에 대해 명확한 그림이 없었다는 자각으로 이어진다.


영화업계와 드라마업계의 혼합이라는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나는 채널 드라마의 가벼운 로맨스 장르의 요소 — 남녀의 대사 위주의 전개, 사랑의 위기를 위해서만 작동하는 사건들— 와 영화적 요소 — 스릴러, 범죄와 같은 어두운 장르들이 혼합된 로맨스, 더 화려하고 굵직한 사건, 경계에 선 자로써 존재론적인 고뇌를 하는 인물 —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구조도, 장르도, 타깃도, 작품의 규모와 캐스팅도 애매해졌고, 무엇보다 이 기획이 정확히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았다. 날카롭게 벼려야 할 기획은 요소에 요소를 더하다 보니 아무것도 자르지 못할 만큼 절망적으로 무뎌졌다.


명확한 그림이 없이 출발하여 작가와 이 그림을 함께 완성해 가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패인이었다. 신인 작가는 기획자가 제안한 구멍 난 세계를 완성하는 것을 버거워했고, 그렇다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도 못했다. 그렇게 우리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낸 세계는 당장은 그럴듯해 보였지만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버릴 종이 인형의 세상 같았다.


심지어 함께 하던 사람들도 차례차례 떠나갔다. 함께 시작했던 친구, 지지해 주었던 상사이자 대표, 마지막엔 작가마저도 작업을 중단해야만 하는 개인 사정이 생겼다. 선배들은 프로젝트를 잠시 멈추라고 했지만 혼자 남은 그 순간조차도 나는 이 작품을 놓을 수 없었다. 명확한 그림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면 다시 처음부터 그림을 그려서 나다운 이야기가 무엇인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소재만 남겨둔 채 장르, 캐릭터, 스토리를 모조리 다시 썼다. 그러나 마지막 결과물은 대본조차 되지 못한 채 폐기되었고, 프로젝트는 완전히 종결되었다.


슈퍼에서 언제나 잘 팔리는 품목이 초코바라고 하서 기존의 초코바와 비슷한 초코바를 상품화해봤자 웬만해서는 팔리지 않는다. 무엇이 기존의 초코바와 다른지가 핵심이다. 하지만 그래봤자 초코바일뿐이다. 마트에서 천 원대에 형성된 가격의 초코바의 맛을 기대하는 고객에게 색다름을 주기 위해서 더 이상 초코바가 아닌 조합을 만들거나, 고급 재료를 써서 만 원짜리로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늘 잘 팔리는 초코바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가장 오랫동안 붙잡았고, 가장 많이 실패했고, 가장 많이 성장하게 만든 기획. 프로젝트 레드는 이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당시 내가 기획자로서 얼마나 준비되지 않았는지를 알려준 동시에, 기획자란 작품 자체는 물론 상품적 가치에 대한 명확한 그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작업 단계로만 보면 전회사에서 진행한 것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으며, 회사의 다른 프로젝트와 비교했을 때 더 좋은 평을 들었던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이처럼 스스로에겐 의미가 깊지만, 원안을 제안한 친구와 오랜 기간 최선을 다했던 작가님에게 작품이 제작되는 기쁨을 안겨주지 못한 것이 죄스럽다. 기획자의 일이란 이처럼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까지도 직결되어 있기에 더더욱 묵직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4.png

https://brunch.co.kr/@flkr/212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 개의 세계를 거친 기획자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