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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무 오래 입을 다물었다.

나를 침묵케 하는 것들과 이별하기.

by 돌터졌다

언젠가 몇몇 사람들과 꿈 이야기를 할 때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때 새빨갛게 피가 흐르는데....."

"그게 보여? 꿈에서?"


꿈을 꿀 때마다 선명한 색감이 당연했다. 당황해서 그게 당연하지 않으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꿈속에서 나는 새빨간 사과를 따먹거나 누런 개의 등허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인상 깊은 내용의 꿈이 아니라 흔한 개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남들도 그러려니 했다.


주변에 물어보니 다양했다. 나도 컬러로 꿈을 꾼다, 나는 그런 건 기억도 안 난다라고 하거나.

그러고 보니 이것도 물어볼 걸 그랬나 싶은 게 또 하나 있기는 하다.

같은 꿈을 수십 년에 걸쳐 꿀수도 있는지...







"하아~~ 콜록콜록"


눈앞이 온통 하얗다. 땅이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발밑은 눈으로 덮여있다.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는데 하늘은 눈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하얗다. 온통 하얗기 때문에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서부터가 땅인지 그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 그 가운데 가끔 내뿜는 내 입김도 눈처럼 희다.

계속 걷고 있다. 방향도 목적지도 모르겠지만 서 있을 수 없어서 걷고 있다. 한 가지 짐작되는 건 나는 이곳을 힘이 다할 때까지 걸어갈 사람이라는 것. 뺨과 귀가 오히려 화끈거리며 열이 나기에 눈을 한 주먹 퍼서 식혀볼까 고민하면서도 계속 걷고 있다.

무엇을 해도 표시 나지 않는 이 순백의 공간에서 드디어 눈이 되길 원하고 있다.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내가 잊을만하면 몇 년에 한 번씩 거대한 눈 속을 헤매는 꿈을 꾼다. 이젠 꿈속에서 뽀드득뽀드득 걷는 그 재미까지 느끼고 있다. 그 헤매는 꿈을 꾸고 나면 모든 것을 점검하곤 했다.


3번째 같은 꿈을 꾸었을 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꿈은 내가 바라는 나의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평화롭고 고요하지만 혼자 외롭게 감당해야 하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추위를 온전히 느껴야 하는 것.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조차 못하는 걸 보면 그 눈밭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


끝없이 걸어감으로써 그래도 눈밭을 벗어나볼까 싶다가도 마지막 남은 불타는 듯한 뺨과 귀의 온도를

스스로 꺼버리고도 싶은 갈등.



자책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뭘 잘했고 못했고 따질 것도 없었다. 다만 그때그때 꺼내어 적당히 말하면 됐다. 만약 그러기만 했다면 십 대, 이십 대, 삼 심대 등등 내가 그동안 꿨던 그 많은 꿈들의 색깔을 기록했을 수도 있겠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고 안으로 접고 또 접어봐야 더 접을 수 없을 때 그 당황스러움은 연민으로 돌아와 더 숨 막히게 한다.

내가 놓친 그 새빨간 사과들, 누런 강아지, 파란 지붕에 노란 꽃이 가득 핀 어느 예쁜 집, 보라색 케이크를 잘라먹던 나의 예쁜 주황색 봉숭아물들인 손톱. 모두가 아름다웠다. 아름다웠다고 말하기만 하면 됐다.


나는 너무 오래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입을 연다.

나는 아직 고운 색깔을 많이 가졌다고. 이제 다 말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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