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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르고운 Sep 08. 2022

등외품 앞에 굴러온 도사리

비닐봉지에 담아서 싼값에 파는 그런 등외품 사과이었지 싶다.

   

  5월 어린이날을 낀 연휴 4일 가운데 두 번째 날이다. 모처럼 연휴이니 오지게 보내겠다고 벼르던 마음과는 달리 이틀째 전주 바닥을 떠나지 못했다. 어제 오후에 수필 동아리 모임에 하루를 흘려보내면서 일이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두 딸과 아들이 어버이날을 앞당겨 점심을 먹자고 연락해왔다. 여러 날 전에 별일 없으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일이어서, 만나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아들딸들이 벌써 나이 들어서 인생의 후반기를 지나는 걸 보며 참 많은 시간이 흘러갔음을 생각했다.

  세 아이 다 내 손으로 받아내다시피 출산을 지켜보았고 마음 졸이게 하며 자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큰딸이 50대 나이가 되었다. 아이들이 어른으로 자라는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간 시간은 지금 어디에서 흐르고 있을까? 아이들의 시간 속에서 내가 머물렀던 시간을 가려내 보려 했지만, 그 시간에 따로 쉼표나 따옴표가 붙어있는 것이 아니어서 가려낼 수 없었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던 아이들의 발걸음이 여기에 이른 것만도 고맙다. 아이들의 시간도 내 시간처럼 그렇게 어디론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걸 언젠가 알아챌 것이다. 그 시간과 함께 소멸하는 유무형有無形의 상념과 가치를….


  아이들은 커피 한 잔씩 앞에 두고 저희끼리 수다에 빠져 내 존재쯤은 까맣게 잊은 듯 신바람이 났다. 저마다 사느라 바빠서 만나지 못한 동안 스쳐 가거나 맞닥뜨린 일을 꺼내 들고 의미를 찾거나 자랑하고 새로운 이름을 짓느라 열중이다. 저 애들을 키우면서 조바심했던 나의 간절한 생각은 지난 시간 속에서 퇴색하고 지워져 이렇게 ‘무슨 날’ 속에 가벼운 의미만 남아 있다. 그저 이 세상을 함께 걷는 낯익은 이웃이랄까?

  초로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모이면 아이로 돌아가는 그들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 틈새조차 없다. 말을 얹어 본들 공연히 저희끼리 어울려 노는 데 방해가 되지 싶어 슬그머니 일어섰다. 

“약속이 있어 먼저 가겠다.”하고 카페에서 나왔다.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보는 건 마음이 텅 비어 뭔가 채워야 할 기분이 들 때에 나오는 내 버릇이다. 구름 사이로 이따금 푸른 하늘이 보였다. 활짝 갠 하늘이었으면 싶었지만, 그게 어디 내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이겠는가. 


  온화하고 덥지도 춥지도 않은 5월의 연휴인데 막상 아이들과 헤어져 나오니 갈 데가 없다. 연휴 계획대로라면 자전거로 서해안이라도 달리고 있을 시간인데, 내일은 종일 비가 온다니 떠날 수도 없다. 날 기다리는 사람도 오라는 사람도 없는, 그렇다고 찾아갈 곳도 마땅히 없는 그런 투명 인간이 되어 있다는 게 서글펐다. 이런 연휴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일도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냥 나 혼자 놀아보기로 했다.

  마음이 비어 허전하면 걷는 게 조금은 약이 된다. 걸으면서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그 속에서 날 위로할 무엇인가를 찾거나, 스치는 바람과 자연의 조화를 가슴으로 안아서 걸러내다 보면 가끔은 작은 기쁨을 만나기도 한다. 평소에 어둑발이 내리는 거리의 풍경이 좋아서 퇴근할 때 가끔은 시오리가 넘는 길을 한량 걸음으로 걸어 돌아오기도 했다. 

  거리에는 폭발하는 젊음이 있고 젊은 연인들의 사랑이 흐른다. 그들이 쏘아내는 열정과 사랑의 뜨거운 기운이 내 삭아버린 가슴에 작은 위로처럼 다가서는 일이 좋아 걷는다. 때로는 손님 한 명 없는 쓸쓸한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팔아주거나, 그 시간까지 어설픈 노점을 펴고 앉은 노인의 좌판에서 풋고추라도 한 줌 사주는 작은 기쁨도 얻을 수 있다.        

  연휴의 변두리 길이어서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발길 닿는 대로 가보자는 마음으로 그냥 걸었다. 조금 걷다가 금세 마음에 변덕이 생겼다. 한산한 길을 혼자 터덜터덜 걷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일껏 걷는다는 게 동네 길을 두어 바퀴 돌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발걸음조차 가난해졌음을 자책하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아파트 정원 벤치에 앉았다. 외로움이 사무치도록 밀려들었다. 보드라운 봄바람이 좋아 집에 올라가기는 싫고 그냥 앉아 잠시 졸겠다는 생각으로 다리를 뻗고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나른하게 졸음이 밀려오는 듯했는데, 뭔가 툭! 신발을 건드렸다. 눈을 뜨고 살펴보니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인 매실 도사리가 발 앞에 있다. 저만큼 선 매실나무에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하는 매실이 올망졸망 달려있고 밑에 도사리 몇 개가 떨어져 있다. 선택받지 못한 열매가 떨어져 경사면에 튕겨 내 신발 앞까지 굴러온 것이다.

  초봄에 환하게 피어 꽃소식을 전했던 매화가 열매를 맺어 자라면서 스스로 솎아내기를 하는 장면을 내게 들킨 것이다. 겨울을 이기고 꽃으로 피어 열매 형상을 이루었지만, 한 알 매실로 자랄 수 없는 열매였나 보다. 떨어지는 도사리들은 운이 나쁜 게 아니라 제대로 자랄 수 있는 열매를 위해 스스로 희생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일 것이다. 모두 다 자라서 익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매실만 그런 게 아니라 사과도 여러 번의 선택을 거쳐 과일이 된다.

  오래전에 지인의 사과 농장에서 가끔 일손을 도왔다. 사과꽃이 피면 좋은 가지에 핀 꽃을 남기고 주변의 꽃을 모두 따버린다. 그 꽃에 열매가 여러 개 달리면 가장 튼실한 열매를 남기고 모두 따낸다. 가을에 사과가 익어 수확해서는 다시 선별기를 거쳐 선과選果하면서 크기를 구별하고 상처가 있거나, 모양이 나쁜 것 등을 골라낸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야 상품으로 사과가 되는 것이다. 적화摘花, 적과摘果를 거쳐 수확 때까지 벌레나 새들이 파먹지 않아야 하고 기형이거나 얼룩이 없어야 마침내 상품으로 사과가 된다. 


  여러 차례의 선택을 거쳐 사과가 되듯, 인생도 숱한 선택에서 살아남는 과정을 거친다. 내가 사과였다면 과연 어떤 사과였을까? 아직도 세상일을 하며 견디는 걸 보면 ‘도사리’는 면했다 싶지만, 당도 높은 특등 과일로는 거리가 멀고 등급에도 들지 못하는 비틀어진 사과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가을에 포장도 하지 않고 적재함에 가득 싣고 와서 비닐봉지에 담아서 싼값에 파는 그런 등외품 사과이었지 싶다. 

  때깔 좋은 간판 하나 달지 못해 어설픈 글 품팔이를 하며 살았고 아내마저 먼저 보내서 외기러기 신세다. 등외품 인생에도 목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어서 뭔가 써보느라 애쓰며 발싸심하는 늙바탕의 삶이다. 속절없이 누군가 내게서 단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도 자판을 더듬는다. 


  벤치에서 일어서는데, 다시 발 앞에 매실 도사리 한 알이 또르르 굴러와 이 등외품에 경의를 표하듯 다소곳이 꼭지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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