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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링의 집에 일본 직원이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노인 한 분이 서 있었다. 링링은 노인이 다카히로의 부친이라고 짐작했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 주름과 피부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마의 남아 있는 깊은 상처는 주름으로 감춰지지 않았다. 노인의 눈빛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움직임도 느리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링링이 말했다.
노인은 링링의 인사에 정중히 답하고 고개를 돌려 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마치 오래전 자신이 알고 있던 곳에 찾아온 사람처럼 여유가 있었다. 일본 직원이 링링에게 다가와 말했다.
"제가 호텔에 방을 잡아드린다고 했는데, 굳이 이 근처에 와서 방을 정하겠다고 해서 그냥 오게 되었습니다."
링링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근처에는 작은 민박이라도 없습니다. 여기서 한참 걸어서 큰길로 나가야 하는데...."
링링은 불편한 몸으로 여기까지 아들을 찾아온 노인을 나가라고 하기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럼, 제가 하룻밤을 여기서 지낼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본 직원은 노인에게 링링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노인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맙다는 표시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는 손님들이 오면 묵을 수 있는 사랑방으로 노인을 안내했다.
"저녁을 준비하려 하는데, 함께 먹어요."
일본 직원은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저는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회사에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 제가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런데 노인분이 어떤 음식을 먹을지 모르겠습니다. "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해서 점심때 야채죽을 드셨어요."
링링은 일본 직원을 문 밖으로 나가 배웅하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노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노인은 집 안 여기저기 걸린 난징 전쟁 당시 사진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물에서 죽은 사람들의 얼굴 사진까지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틀 뒤 철거를 앞둔 우물은 상단을 먼저 박물관에 옮겨 놓은 상태였다. 우물의 깊은 구멍은 나무판자로 덮어 놓았다. 노인은 나무판자 옆에 놓인 누름돌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누름돌은 아직도 원래 회색빛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링링은 저녁 준비를 위해 시장에 다녀 올 생각이었다. 오빠를 불러 노인을 부탁하기로 했다. 링링은 풍경을 잡고 흔들었다. 풍경 소리를 들은 오빠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오빠, 일본에서 온 손님인데 내가 잠시 시장에 다녀올 테니깐 오빠가 잘 보고 있어. 알았지? 금방 다녀올 거야."
오빠는 고개를 끄떡였다. 링링은 문을 나와 집 앞에 세워 둔 차에 시동을 켰다. 링링은 주차를 하고 걸어간 곳은 다카히로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봉변을 당했던 시장이었다. 그녀는 노인에게 요리해줄 죽 재료를 찾았다. 신선한 야채와 고기들을 파는 정육점이 눈에 띄었다. 양파, 당근을 장바구니에 넣고 닭고기를 사기 위해 정육점에 들어갔다. 점원은 링링의 모습을 보고 반가워했다.
"니하오, 링링! 잘 지냈어요? 오늘은 무엇을 드릴까요?"
"닭고기로 한 근 주세요"
그곳에는 다른 손님들도 고기를 고르고 있었다. 링링은 시장에 오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두 분의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즈음 반일감정 때문에 일본차들이 수난을 겪고 있다던데 들었어? 내 친구도 일본차를 몰고 다니는데 주차해 놓은 차 유리창이 모조리 깨졌다는 거야."
"그러게, 우리 남편 차도 일본차잖아. 남편은 차 안에 중국 국기를 붙여두고, '이 차의 주인은 중국사람입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어."
"일본인들도 봉변을 다했다는 이야기 들었어? 최근에 일본에서 난징으로 출장 온 몇몇 사람이 어디론가 끌려가서 맞았다는 거야. 아직 범인은 잡히진 않았는데, 목격자 말로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라는 거야. 얼굴에 마스크를 껴서 누군지 확인이 안돼서 경찰이 찾는데 애를 먹는다고 하던데."
링링은 문득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설마'라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지금 집에 일본인 노인을 오빠에게 맡겨두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오, 이런 바보 같이....”
그녀는 재빨리 계산을 하고 정육점을 나왔다. 처음엔 빠른 걸음으로 가다가 조급한 마음에 달리기 시작했다. 장바구니에 야채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차 문을 열자마자 시동을 켰다. 그녀의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들이 떠올랐다. 얼마 전 집에서 사라진 일본인도 오빠가 어디론가 데려간 것 같았고, 지금 오빠가 방망이를 들고 노인을 때리는 장면이 스치듯 지나갔다. 귓속에 누군가의 음성까지 들렸다.
"그를 찾았어. 그를 찾았어. 빨리 와!”
그녀는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6시 15분이었다. 집에 도착하려면 20분 정도 걸렸다. 그녀는 액셀을 좀 더 세게 밟았다. 하지만 큰 도로에 들어서자 퇴근길로 차들이 막혀 앞으로 가질 못했다. 링링은 후진해서 다른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링링이 시장에 간 뒤, 노인은 우물가에 앉아 누름돌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우물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링링의 오빠가 노인에게 다가가려 했을 때였다. 대문이 열렸다. 링링의 엄마와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랜 세월로 노인의 얼굴이었지만 어릴 적 류원의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류원은 모처럼 남편 장천과 함께 링링의 집에 들렀다.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있는 류원 곁에는 항상 남편 장천이 그녀를 보살폈다. 링링의 오빠는 엄마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얼른 자리를 피했다.
노인은 류원의 얼굴을 보았다. 류원도 노인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류원은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엄마를 죽인 일본군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다. 류원은 갑자기 발작증세를 보이며 노인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나쁜 놈! 나쁜 놈! 여기가 어디라고.”
엄마는 링링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를 찾았어. 엄마를 죽인 그를 찾았어. 빨리 와!”
남편 장천은 그녀를 잡고 노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막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링링의 오빠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오른손에는 방망이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