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가의 삶> (6) 독서모임
대학생 시절, 마음맞는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갖곤 했던 것이 내 독서모임 라이프의 출발이다. 친구 H와는 단 둘이서 모임을 갖기도 했는데, 단둘이 책 속 이야기에 몰입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매번 모임 겸 수다 시간은 네시간이고 다섯시간이고 훌쩍 넘어갔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친구와 논쟁을 펼치다보면, 어느새 우리가 같이 읽은 책보다 나눈 이야기의 두께가 더 두꺼워지는 것 같았다. (H는 현재 아이들에게 독서 교육을 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작은 독립서점을 열었다. 서점에서는 책을 진열하고 파는 것보다도 독서모임이 비중을 더 많이 차지했다. 자유독서모임 시간에는 각자 읽을 책을 가져와 읽다가, 누구 하나가 말문을 트기 시작하면 그대로 수다 파티가 이어졌지만, 그것이 자유독서모임의 묘미였다. 그러다보면 출출해지고, 먹을 거 하나 놓고 이야기하다보면 또 이야기의 강둑이 터져 바다가 되고… 그래도 그들과의 수다가 피곤하지 않았던 것은 책을 매개로 만나 이야기나누기 때문이었다.
일요일 오전에 만나 정해진 책을 읽고 와서 공부하고 대화하는 모임의 이름은 하드독서모임이었으나, 현재는 고하리로 불린다. (Go, Hard, Read) 혼자 읽기 어려운 책들을 같이 읽는 모임으로 시작했는데, 7년째(햇수를 세어본 것은 처음인데 정말 오래되었네)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 기간 동안에 나는 책방을 접고 제주로 왔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친구들도 있고, 그떄와는 많이 달라진 환경이지만 여전히 2달에 한번 온라인으로 책모임을 갖는다.
고하리 친구들의 물심양면 도움 덕분에 책방을 꾸리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 때 나는 책보다 책친구들에게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친구들은 작은 것애도 마음을 담아 자주 나누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엽서에 책 글귀를 써서 전해주었고, 말 모양의 스펀지를 보고 생각이 났다며 그것을 선물로 주기도 했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을, 그가 바로 옆에 있지 않더라도 갖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놀라웠다. 그리고 그 마음을 짧은 글이나 작은 물건에 담아 전하는 것도. 그리고 또 그런 마음을 받는 것이 꽤 일상을 사는 큰 힘이 된다는 것도 책방 친구들로부터 배웠다. 같이 지내는 사람들이 나를 만든다는 말처럼, 나는 그들과 지내면서 더 자주 나누는 마음을 조금씩 따라했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제주에서도 독서모임은 이어진다. 운이 좋게도 나는 제주로 이주해와서도(제주로 온다는 것은 이사보다는 이주가 어울리는 단어) 북클럽과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는 회사에 들어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또 읽는 사람들을 계속 만날 수 있었다. 직접 북클럽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자유독서모임 <고독한 독서가>와 지정독서모임 <무용한 독서 클럽>이 그것의 이름이었다. 회사는 문을 닫았는데, 모임과 만남은 이어지고 있다. 책으로 이어진 인연이 이렇게나 질기다. 또 회사 밖에서도 책으로 인연을 만나도 싶어 홧김에(?) 만든 <감귤독서유랑단>도 있다.
제주에서의 책모임은 친구와 하던 모임, 책방에서 하던 모임과는 다른 의미를 준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제주에서 내가 이제는 어느정도 발 붙이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제주 책친구들을 만날 때 느낀다.
토요일엔 감귤독서유랑단 모임을, 어제는 고독한 독서가 모임을 했다. 이번 모임에서도 책친구들을 보며 더 나아지고 싶다고, 내 생활에 좋은 요소를 하나 더 더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독한 독서가>에서 만난 J님은 최근 읽은 책으로 <기록하기로 했습니다>라는 에세이를 추천해주었다. 꽤 여러차례 만나 이야기 나눴던 J님이었는데, 이번 모임에서야 처음으로 그가 기록에 진심이고 심지어는 기록에 대한 글을 쓴 저자보다도 더 진심으로 기록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J님이 보여준 기록만 대충 읊어 보아도 여행 노트와 일기장은 물론, 10년 다이어리, 독서 기록 등등이 있었는데 가장 놀라운 것은 지각하는 습관을 고치려 3개월 동안 매일 기록했다는 아침의 행적(?) 스프레드 시트였다. 기상 시간과 일어나서 무엇을 했는지를 차트로 기록하고, 지각했다면 왜 지각했는지, 어떻게 고칠 것인지를 한줄로 적어두었다. 또 자신의 방 사진을 종종 찍어둔다고. 나도 기록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J님 앞에서는 발가락의 털도 내밀지 못하는 정도였다.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2주 동안 외면했던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오늘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이름을 일기장에 적었다. 몇 년 전에 만났던 사람들 중 희미해진 이름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잊지 않으려 적어두었다. J님의 기록 열정이 나에게로 옮겨져 거의 꺼져가던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감귤독서유랑단을 함께하는 Y님은 책과 대화하듯이 책을 읽고, 정말 그 속에 푹 들어갔다가 나오는 방식의 책읽기를 한다. 책과의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읽는 나와는 아주 다른 스타일이라서 나는 Y님의 읽기 방식을 따라해보고 싶다.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많은 책을 읽는 것을 목표로 두고 여러 책들을 읽어 치우는 데 몰두했다. 남는 것이 없지는 않지만, 문득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Y님의 책을 보니 챕터마다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생각을, 저자에게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솔직한 마음과, 더 알고 싶은 내용과, 자신의 감정을 적어둔 메모들이 남아있었다. 책 속으로 들어가기. 글 안에 나를 집어넣고 글 안에서 나를 발견하고 꺼내보면서 읽는 독서법을 따라해보고 있다. 여태까지 해온 읽기와는 다른 방식이어서 바로 잘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속 따라해보려고 한다. 많은 책을 읽어내면서 필요한 것만 쏙쏙 뽑아먹는 읽기보다는, 느리게 읽으면서 깊게 들어갔다가 나오는 경험을 계속 쌓아보려 한다. 이런 독서법은 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하며.
책을 읽는 이유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하던 부분,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 경험과 탐구의 깊이와 밀도가 높은 사람이 쓴 한 권을 읽고 나면 내 생각의 폭도 조금 더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것을 같이 읽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은 또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 나의 생각의 문을 열어준 독서모임 책 :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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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모임에서 읽었고 읽을 때마다 할 얘기가 많은 책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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