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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중년 남자 Nov 12. 2023

내 인생의 영화 14 <황해>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영화 <황해>는 삶의 벼랑 끝에 몰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극단적 상황에 처한 남자 이야기는 종종 영화적 소재가 되지만 <황해>가 남다른 점은 이야기의 외연을 넓혔다는 점에 있다. 황해를 맞대고 있는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인간 세상의 거대한 무질서와 끝간 데 없는 욕망의 광기를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는 <황해>는 진한 여운을 남기며 이른바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의 수작으로 꼽을 수 있는 영화다.     


  ‘연변에 개병이 돌고 있다’라는 구남의 독백은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용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연변 어디에서도 사회주의 중국을 발견할 수 없다. 철저히 자본화된 그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된다. 택시기사 구남은 한국으로 돈 벌러 떠난 아내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마작을 하며 지낸다. 도박 비용과 아내의 한국행 비용 등으로 사채업자의 돈을 빌려 쓴 구남은 계속 늘어가는 빚독촉에 시달린다. 설상가상 한국에 간 아내와는 연락이 끊어진지 오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나날들, 그 절망의 끝에서 구남은 면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마침내 황해를 건너는 구남, 밀항이라는 극한의 고통을 견디며 도착한 한국은 어떤 곳인가. 구남과 같은 이방인이 결코 발붙이기 힘든 공간이며, 연변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무소불위의 ‘자본’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무능한 공권력은 인간들의 광기어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그 결과로 가족과 공동체는 산산이 부셔진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이별과 살인과 비극이 초래되고 개인은 허망하게 희생된다.      

  <황해>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구남을 놓친 면가 일행이 그들의 아지트로 돌아와 텔레비전을 보며 족발을 물어뜯는 부분이다. 흥미롭게도 면가의 아지트는 집이라기보다는 동굴처럼 묘사되고 있고, 게걸스럽게 족발을 먹는 면가 일행은 흡사 그 옛날 원시인들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로움, 최첨단의 과학시대, 인간의 존엄성, 선진화된 문명세계를 지향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장면은 말한다. 우아하게 포장된 한 껍질만 벗기면 드러나는 원시적 폭력성, 패거리 의식, 갖가지 어휘로 포장된 소유욕과 색욕 등에 대해. 곧이어 등장하는 돼지 족발을 휘두르는 면가의 모습은 그러므로 상징적인 장면이다. 극중 태원은 여자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면가는 오로지 돈 때문에 무시무시한 살인과 범죄를 서슴치 않는다. 구남은 그 둘 모두 때문에 일을 맡는다. 그리고 셋 모두는 죽는다. 돈과 여자, 예로부터 남자가 죽고 사는 가장 분명한 이유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여자(가정)은 인간의 욕망과 폭력성을 투영하는 뚜렷한 목적이지만 결코 그것이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갈망하면 할수록 달아나는 신기루 같은 것으로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차 잊은 채 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던가. <황해>는 구남이 그토록 목마르게 기다렸던, 인간이 가장 중요시하는 기본적인 가치가 어떻게 훼손당하고 그 결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적나라하고 차분히 보여준다. 너무나 적나라해서 일견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고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영화로부터 느껴지는 분노와 공포는 어쩌면 이 거대하고 비정한 현실 사회에서 오직 하나의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개인’이 느끼는 공포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다시 영화의 처음 구남이 말했던 ‘개병’으로 돌아가보자. 그 ‘개병’이라는 것은 지 어미와 주위 동물들을 물어죽이다가 결국엔 굶어죽게 되는 병이다. 구남이 읊조렸던 그 ‘개병이 도는 세상’은 모든 것이 돈으로 치환되는 무소불위의 자본, 즉 ‘물질적 탐욕’을 쫓으며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낙오하고 절망하거나 그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아 계속해서 이길 대상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파국을 맞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황해>는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의 문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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