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날 기억하나요-<러브레터>
내가 20대를 보낸 1990년대에 두 명의 아시아 감독이 한국 청춘들의 마음에 커다란 진동을 주었는데, 한 명은 홍콩의 왕가위고, 또 한명은 일본의 이와이 슌지였다. 물론 그밖에도 여러 감독들과 배우들이 있겠으나, 90년대 당시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하며 많은 영향을 준 감독이라면 나는 개인적으로 그 둘을 꼽겠다.
이와이 슌지 하면 역시 <러브레터>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정식 개봉 전에 대학가에서 먼저 영화제 상영본이 돌았던 것 같다. 1995년작인데 97년쯤 처음 본 것 같다. 이후 일본 문화 개방이라 하여 몇편의 영화들이 정식 개봉되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 <러브레터>도 개봉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기억이 난다. 하얀 설산을 향해 ‘오겡기데스카’를 외치던 주인공, 크, 그것이 가슴을 쿵하게 쳤던 것 같다. 그리하여 이 <러브레터>는 말하자면 아시아 멜로영화에 한 획을 그었다, 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 가령 한때 유행하던 대만의 학원 로맨스물 등등이 이 <러브레터>의 자장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올 겨울 눈이 많이 오고 있는데, 이 영화 <러브레터>에도 눈이 참 많이 나온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새하얀 눈으로 시작해서 눈으로 끝나는데, 그에 걸맞게 맑고 투명한, 순도 백프로의 영화가 아닐까 싶다. 첫사랑, 교복, 학교, 자전거, 츤데레 이런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또한 황망히 떠나보낸 사랑을 잊지 못해 어쩌지 못하는 여주인공의 순애보,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며 다가가는 선배, 우연히 받게 된 편지를 통해 중학 시절 같은 반, 같은 이름을 가진 남학생을 추억하며 그것이 인생에 있어 잊지 못할 빛나던 순간이었음을 다시 느끼는 또 다른 주인공. <러브레터>는 이와이 슌지의 섬세한 연출력과 인생의 면면을 건드리는 다층적인 내러티브, 그리고 아기자기하고 잔잔한 풍경, 멋진 음악이 잘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과 매력을 선사했다.
눈 오는 겨울이면 떠오르는 영화로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영화이고, 주제곡 <윈터 스토리>도 들을 때마다 기분 좋은 감동을 준다. 나도 학창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준비 중인데, 이와이와 같은 감성은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다. 하하. 물론 나는 나대로의 이야기를 펼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