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노엘 Sep 04. 2018

무언가를 잊어야 한다면.  

걷는 걸 좋아한다. 기억을 거슬러 보면 학창 시절에도 나는 걷고 있었다. 독서실에 있어야 할 시간인데 기억 속 나는 마음 맞는 친구들과 둑길을 걷고 또 걷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도 둑길을 걸었고, 바람이 매서운 겨울에도 얼굴이랑 허벅지가 얼얼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뭐가 그리 좋았는지. 그때는 친구들이랑 시답지 않은 고민과 별 것도 아닌 농담을 하면서 걷는 게 재미있었나 보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수업이 다 끝나면 저녁을 먹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면 캠퍼스를 걸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서, 차는 별로 안 다니지, 나무는 많지, 마치 공원처럼 꾸며져 있는 캠퍼스는 공부보다는,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입사 후에는 퇴근 후 대충 저녁을 챙겨 먹고 월드컵 공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이 때는 첫 사회생활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걷기의 이유였다. 하루 동안 회사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걷는 걸로 풀었다. 월드컵 공원은 하도 넓어서 하루에 세 시간씩 걸어도 공원을 다 둘러보지 못했다. 퇴근 후 세 시간씩 걸었으니 당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자유 시간을 걷는 데 쏟았던 것 같다. 매일 걷는 월드컵 공원인데도 나는 질리지 않았다. 바람이 달랐고, 그 날의 냄새가 달랐다. 비 온 뒤에만 맡을 수 있는 상쾌한 공기 냄새, 비 냄새에 가끔씩 섞여오는 달달한 풀내음. 어떤 날엔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 냄새가 가슴 깊은 데까지 들어와 괜히 발걸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어떤 날엔 봄이 오느라 아지랑이처럼 녹아내린 향긋한 꽃 냄새가 코 끝을 간질이기도 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공원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도 했지만 매일 변하는 바람 냄새 덕분에 나는 몇 년이고 똑같은 코스로 공원을 걸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바람 냄새를 맡으며 멍하게 걷는 걸 좋아하는 나는 하와이에서도 걷기에 딱 좋은 장소를 발견했다. 마카푸 트레일(MAKAPUU TRAIL). 한국의 둘레길처럼 힘들이지 않고 천천히 걷기에 제격이다. 호놀룰루에서 멀지도 않다. 동쪽 해안을 따라 차로 약 20분 정도면 마카푸 트레일에 도착할 수 있다. 다만 날씨가 조금 흐린 날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오르는 내내 해를 가려줄 그늘이 전혀 없기 때문에 마카푸의 매력을 온전히 느끼려면 약간의 구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트레일 초입에 들어서면 먼저 넓은 들판이 보인다. 무성한 초록빛이 아닌, 야리야리한 연둣빛 들판. 웅장하거나 입이 떡 벌어지게 광활해 알지 못할 긴장감을 주는 들판이 아니다. 적당히 트여 있어 편안함과 여유를 주는 들판이다.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 괜히 마음이 열리고 많이 친하지도 않은데 안심이 되는 사람처럼 스르르 긴장이 풀린다. 살랑 불어오는 바람. 바다에서 습기를 먹은 바람에는 윤기가 흐른다. 버석거리며 삭막하게 부는 바람이 아니다. 지나치게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도 아니다. 적당히 따뜻하고 알맞게 시원하다. 윤기로 인해 포근한 느낌마저 드는 바람이다. 겨우 5분 정도 올라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하염없이 들판을 바라보게 된다. 너그러운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나를 보호하기 위해 뾰족하게 세웠던 칼날들을 슬며시 놓아 버리게 된다. 



들판과 저 멀리 바다 위로는 덩어리 구름이 보인다. 말 그대로 덩어리 구름. 집 채 만하다. 하와이 구름은 그동안 봐 왔던 구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크다. 풍덩, 누워보고 싶다. 구름이 하도 크고 두꺼워서 그렇게 뛰어들어도 든든히 나를 받쳐줄 수 있을 것 같다. 섬이라 그런지 구름은 빨리도 흘러간다. 한 5분 정도만 가만히 앉아 하늘을 보고 있으면 구름이 저만큼 흘러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입체적이고 활동적인 구름을 보고 있으면 시간도 훌쩍 지나간다. 편안히 잠이 온다. 음악도 필요 없고 책도 필요 없다. 그냥 하늘만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도 빨리 흐르고 마음도 잔잔해진다. 하와이 구름에는 묘하게도 이런 힘이 있다. 마냥 구름을 바라보고 있으면 잠이 들 것 같으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함께 걷는 사람들이 보인다. 마카푸 트레일은 와이키키처럼 시끌벅적하지 않다.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길이다. 친구들끼리, 연인끼리, 가족끼리 오르고 내리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다. 길이 험하지 않아 아이들도 올라갈 수 있다. 한 시간 정도면 정상에 도착한다. 쪼리를 신고 설렁설렁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임신한 사람도 있고, 대여섯 살쯤 보이는 어린아이들도 보인다.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를 품에 안은 아빠도 있다. 천천히 올라가는 사람도 있고 헉헉대며 힘차게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각자 자기 사정에 맞게, 자신의 속도대로. 그러나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결국엔 모두 함께 마카푸에 오를 수 있다. 



이제 중반쯤 오르면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와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야리야리한 에메랄드 빛 바다가 아니다. 호놀룰루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수심이 깊어 시퍼렇게 푸른 바다다. 시퍼런 바다와 새하얀 파도의 명백한 보색 대비를 보고 있으면 그동안 마카푸에서 느끼지 못했던 웅장한 떨림 때문에 살짝 긴장이 된다. 맞아, 바다가 이렇게 깊은 거였지, 새삼 깨닫는다. 탁 트인 넓은 바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아 있는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면 "와, 좋다!"라는 단순한 탄성이 절로 나온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바다는 한여름 밤의 맥주 한 캔만큼이나 짜릿하고 통쾌하다. 운이 좋으면 저 멀리 바다 위로 뛰어오르는 혹등고래들을 만날 수도 있단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정상이 눈 앞에 보인다. 혹등고래를 볼 수 있다고 쓰여 있는 간판을 지나고 모든 걸 넉넉히 품어줄 것 같은 바다를 봤다면 정상이 거의 남지 않았다. 찬찬히 오르느라 잘 몰랐겠지만 지금쯤이면 콧방울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을 게다. 워낙 오르기 쉬운 나지막한 트레일이어서 힘든 줄 몰랐는데 어느새 땀이 났다. 적당한 운동을 했을 때 느껴지는 개운함. 바다로부터 끊이지 않고 불어오는 윤기 있는 바람 덕분에 발걸음은 여전히 가볍다. 빨간 지붕의 등대가 보인다.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빨간 등대는 귀여운 모자를 쓴 아기처럼 앙증맞다. 정상에 도착해 사방을 둘러본다. 저 멀리 바위 섬도 보이고 파란 하늘, 덩어리 구름, 끝이 없을 것 같은 바다도 여전히 보인다. 하루 종일 이 곳에 서 있어도 전혀 질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이다. 




그러다 갑자기 깨닫는다. 이 곳을 오르는 동안 처음에는 걷느라, 그러다가 바람을 맞느라, 구름을 보느라, 그러느라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있었음을. 큰 기대 없이 시작했던 하이킹이었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돼 별 것 아닌 트레일인 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꿈을 꾼 것처럼 완전히 다른 세상 속에 들어와 있었다.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완벽하게 영화에 몰입해 잠시 잠깐 현실을 깡그리 잊게 되는 것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이 생각, 저 생각 별별 생각을 다 끄집어 내, 항상 나를 괴롭히는 내 머리가 이때만은 작동하지 않았다. 전원을 끄고 깊은 낮잠을 잔 것 같았다. 시답지 않은 걱정들, 어제 했던 실수나 다이어트, 저녁 메뉴, 오늘의 할 일 등 언제나 열심히 왱왱 작동하는 머릿속 퓨즈가 완벽하게 끊겼다. 



잊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 곳을 추천한다. 


지우고 싶은데 억지로는 잘 안 지워지는 일들이 있다. 헤어진 연인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나에게 주었던 상처일 수도 있고, 내가 끝끝내 삭히지 못하는 큰 화일 수도 있다. 부끄러운 과거일 수도 있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하지만 망각의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계속 그 사람 얼굴이, 당시 상대방의 무례함이, 내가 느꼈던 모멸감과 분노가 지긋지긋하게 떠오르고 떠오른다. 그만하고 싶어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잠들기 전에 문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는 그 잠깐 동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툭툭, 불시에, 무방비 상태에서, 나쁜 기억들은 수시로 내 앞에 펼쳐진다. 잊고 싶어,라고 큰 소리로 외쳐도 끝끝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여 봐란 듯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독한 기억들이 있다. 



마음속에서 쓸데없고 번잡한 감정이 자꾸 들끓어 오르면 다시 이 곳을 찾아야겠다. 하루 종일 한숨이 끊이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함께 이 곳에 오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곳.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다녀본 곳이 별로 없는 내가 매긴 등수여서 딱히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을 꼽으라면 자신 있게 마카푸 트레일이라고 이야기하겠다. 이렇게나 마음에 꼭 들었나. 여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라고 매번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오늘 하루 행복하고 단순했다는 점이다. 어느 곳에서든 여기가 제일 좋아라고 확신에 차 말하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어린아이만큼. 


그러면 됐다.



이전 06화 아이들을 위한 기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