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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Aug 18. 2018

아이들을 위한 기도

동물원은, 호화로웠다. 


하와이 나무들은 무성한 잎으로 하늘을 온통 뒤덮을 만큼 풍성하다. 동물원 안의 자그마한 놀이터는 우거질 대로 우거진 아름드리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가만히 기대면 넉넉한 품으로 든든하게 나를 받쳐줄 것 같은 믿음직한 나무들,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 해지는 청량한 녹색, 줄줄 흐르던 땀을 개운하게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반가운 것은 그늘! 그래, 놀이터는 나무 그늘 아래였다. 동물원의 뙤약볕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그늘을 만나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 나무 그늘 아래서라면 아무 걱정 없이 두 발 쭉 뻗고, 한숨 푹 자다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싸고 호화로운 호텔에서보다도 훨씬 더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도 나와 같은 기분이었나 보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에는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싱그러운 웃음이 퐁퐁 묻어나 있었다. 꼬질꼬질한 미끄럼틀만 덩그마니 있는, 시소나 그네 정도도 없는, 별 볼일 없는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맨발도 아무 문제없다는 듯 이 곳 저 곳을 신나게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문득, 내가 어렸을 때 놀았던 놀이터가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그때 서울은 이름만 서울이었지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정부는 그제야 막 집들을 짓고 도로를 포장하며 서울을 도시로 개발하려고 박차를 가하고 있었나 보다. 골목에는 이 곳 저 곳 집들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나마 아파트를 짓는 공사는 흔치 않았고 공사의 대부분은 다세대 주택을 짓기 위한 것이었다. 꼬맹이였던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공사에 사용될 모래더미에서 주로 놀았다. 그네나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는 아파트 단지에나 가야 볼 수 있었고 주택단지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나의 놀이터는 공사장 모래더미였다.

나는 길에서 굴러다니는 빈 바나나 우유 통 같은 걸 주워 모래 놀이를 했다. 모래 놀이를 하다 보면 작은 조개껍질을 종종 발견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조개껍질은 어느 한쪽이 깨져있곤 했는데 모양이 온전한 조개껍질을 보게 되면 예뻐서 집에 가져가야겠다며 소중히 주머니 안에 넣었다. 남아 뒹구는 벽돌을 주워, 그 위에다 풀을 찧으며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돌멩이나 이름 모를 풀 같은 건 길가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공사장 모래더미를 놀이터 삼아 놀던 나는 우람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오롯이 아이들만을 위한 진짜 놀이터를 보니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동물원 안에서 노는 아이들이 부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의 유년 시절이 불행했다는 건 아니다. 


우거진 숲 속 아래 놀이터에서든, 공사판 모래더미에서든, 아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어느 곳에서든지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다.

행복한 기억들은 차곡차곡 누군가의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쌓여 있다. 그러다 갑자기,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어둡고 외로운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한 순간에 배신당했을 때, 아니면 반대로 지금의 삶에 더없이 만족하고 있는 때, 어느 때이든. 그리고 가끔은 생뚱맞게, 아이들의 놀이터를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런 기억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튀어나온 기억은 살며시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든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엄마, 아빠와 함께 산더미처럼 많은 감자튀김을 만들어 먹던 장면들, 집에서 함께 카스텔라를 반죽해 구워 먹던 시간들, 골목에서 어두운 밤 불꽃놀이를 했던 환한 순간들. 아련하게 멀어진 어린 시절의 따뜻함으로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자신만의 따뜻하고 소중한 장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서럽게 울고 싶은 날이나 혹은 어느 누구에게 전화조차 할 수 없는 고독한 날에, 홀로 방에 덩그마니 앉아 있다가도 불쑥 따뜻한 추억을 꺼내 보면서 자신을 도닥일 수 있을 테니까.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아 속상하거나, 누군가의 사랑을 얻지 못해 풀이 죽어 있을 때라도 사랑받던 기억을 되새기다 보면 네가 뭔데, 라며 주눅 들었던 마음을 툴툴 털어낼 수 있다. 문득문득, 시시 때때로, 내가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고 내 능력이 너무도 보잘것없다고 여겨져 도저히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라도, 고작 달리기를 잘한다고 나에게 큰 소리로 환호를 던졌던 가족이나 친구들의 함성이 갑자기 떠오르면 다시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싱그럽게 자라는 아이들 모두 어느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도한다. 인생 굽이굽이마다 행복과 기쁨이 가득 넘쳐나는 반면 위험한 유혹과 불행한 사고는 모두 저 멀리 물러나기를. 믿음직한 친구들과 오랜 우정을 나누고, 격려와 위로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모든 아이들이 집이든 학교든 어디서든 넘치도록 충분한 사랑을 받아 나는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도 언제든 나누어 줄 수 있는 풍성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그 사랑 덕분에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환하게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누군가에게 비난과 야유를 던지는 야박한 사람이 아니라 편안한 공감과 글썽이는 위로를 건넬 줄 아는 근사한 사람으로 성장하라고 소곤거린다. 



우리 어른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내 아이만 소중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들을 축복할 수 있는 넉넉한 심장이 우리 어른들에게 필요하다. 놀이터에 만난 아이들에게 너는 소중한 아이란다, 라는 애정 어린 눈빛을 담뿍 지어 보낼 수 있는 어른. 넘어져 울고 있는 아이를 얼른 가서 일으켜 주고, 배고픈 아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한 아이는 없나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릴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라는 개념이 너무 거창한가. 그렇다면 옆 집 아이, 윗 집 아이, 오며 가며 낯이 익은 동네 아이, 내 아이의 반 친구들, 같은 학교 친구들, 얼마 전 태어난 친구의 아이들을 떠올려야겠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아이들. 모두 아프지 말고 상처받지도 말고 마냥 예쁘고 해맑게 잘 자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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