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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노엘 Jun 19. 2019

하와이에서 꼭 사야 할 것  


이국적인 느낌의 하와이 기념품들을 구경하는 것은 색다른 재미다. 하와이 느낌 가득한 그림들, 하와이 사람들이 즐겨 입는 알로하셔츠, 조개 무늬 그릇이며 한여름 크리스마스를 위한 반바지 차림의 산타 소품 등등. 소품이나 기념품 가게는 두고두고 하와이의 뜨거운 태양을 되새길 수 있는 기념품을 사기 위한 관광객들로 언제나 만원이다. 



나중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갈 때 나는 하와이에서 뭘 가져가야 할까. 기념할 만한 게 뭐가 있지? 생각해 보니, 수영을 배웠다. 멋진 폼으로 물살을 가르는 수영은 아니고, 그저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수 있는 수준이다. 발장구를 치면 앞으로 나가기도 한다. 수영장과 바다가 가까운 곳에 있어 물에 들어가 놀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에 뜰 수 있게 됐다. 하와이안 중에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다는 이웃 주민의 말은 사실인가 보다. 처음에는 집 앞 수영장에 구명조끼를 입고 물에서 놀았다. 작은 수영장에 구명조끼를 입고 들어가는 사람은 당연 나밖에 없었고 아마 그런 내 모습이 하와이안들 눈에는 웃기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물이 무서운 나는 꾸준히 구명조끼를 착용했다. 그러다 지금은 물에 둥둥 뜰 수 있게 돼 구명조끼를 벗게 됐고. 



큰 맘먹고 비키니 수영복을 샀다. 이 곳에서는 99% 정도의 사람들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는다. 원피스 수영복을 입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1% 정도 될까 말까다. 래시가드를 입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다. 


몸매가 좋든 아니든,
뚱뚱하든 아니든,
백인이든 흑인이든,
모두 비키니 수영복을 입는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나라 수영장처럼 위에는 래시가드를 입고 아래는 레깅스 형 수영복에 반바지 형 수영복까지 덧입고 나타난다면 그게 더 이상해 보일 정도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있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비키니 수영복을 입게 됐다. 고백하건대, 난생처음이다. 한국에서는 비키니는커녕, 수영복도 없었다. 커서는 좀 나아졌지만 어렸을 때는 셔츠 맨 위까지 단추를 꼭꼭 매는 답답하고 촌스러운 아이였다. 아빠가, 보기에 답답하다고 제발 맨 위 단추 하나는 풀면 안 되냐고 사정을 해도, 안 된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앞뒤 꽉 막힌 꼬마였다. 이런 내가 비키니 수영복을 입다니! 얼떨떨하다.



에라 모르겠다, 는 심정으로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더니, 예상치도 않게, 당당해졌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자신감 있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걸을 수 있게 됐다. 


한 꺼풀 가벼워진 느낌.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날씬한 몸매라는 틀 안에서 숨 막히게, 갑갑하게 갇혀 있던 내가 벽을 부수고 마침내 바깥으로 나온 것 같았다. 신선한 공기가 몸 안에 가득 찼다. 



몸매나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것뿐만 아니다. 사람들 눈치 보느라 우물쭈물 망설일 필요도 없게 됐다. 하고 싶은 맘을 시원하게 내뱉지 않고 우물우물 입 안에서만 맴돌다 삼키지 않아도 된다. 괜히 자신감이 생겼다. 완벽하지 않은 내 단점을 가리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고 혹시 오늘 낮에 했던 실수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잠 못 들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여과 없이 사람들 앞에 뻔뻔스러운 얼굴로 내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비키니 수영복을 입었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틀이 단번에 깨진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꽤나 신경 쓰는 소심한 사람이다. 어딜 가든 누구에게든 나는 멋진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길 바라는 허세 가득한 사람이다. 속은 밴댕이 소갈딱지인데, 너그러운 척, 이해심 많은 척, 쿨한 척하느라 매일매일 헉헉대는 불쌍한 영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생처음 비키니를 입어봤더니 적어도 벗어던진 옷 무게만큼 세상이 덜 무겁다.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하다.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들을 조금 덜어낸 느낌이다. 홀가분하다. 비키니 수영복만 입어도 이런 효과가 있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입어보세요. 발끝이 훨씬 가벼워져요. 


비싼 비키니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타깃(target)'이라는 마트에 가면 하와이 느낌 물씬 풍기는 예쁜 비키니 수영복을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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