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대단한 미식가다. 하와이에 와 보니 그렇다. 이 곳 음식은 너무 짜다. 미국 음식이 대체로 한국 음식보다 짠데 하와이는 더운 날씨 때문인지 음식들이 모두 짜다. 짜지 않으면 너무 달다. 말로만 듣던 레드 벨벳 케이크는 몇 입 베어 먹고는 울 뻔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달다. 한국 음식은 조리법도 다양하다. 데치고, 삶고, 조리고, 튀기고, 다지고, 갈고, 재우고, 찐다. 하와이에서는 주로 고기를 오븐에 구워 스테이크 소스를 찍어 먹는 정도다. 고기 요리만 꼽아도 불고기, 갈비찜, 제육볶음, 두루치기, 삼겹살, 감자탕, 소꼬리찜, 수육 등 한국 음식은 화려하고 다채롭다.
다양한 한국음식에 길들여져 있어서 그런가, 하와이에서 유명한 맛집이라고 해서 가보면, 이게 뭔가 싶다. 30분 이상 줄을 서서 겨우 사 먹은 도넛은 그냥 평범한 도넛이었다. 무한도전에도 나왔던 유명한 쉬림프 볶음밥은 집에서도 간단히 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무난했다. 게다가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받아 간이 테이블과 의자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란. 나는 무방비 상태인데 끊임없이 덤벼드는 파리떼들도 꽤나 골치였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즐겨먹는다는 쉐이브 아이스는 뭐랄까. 갈아놓은 얼음에 불량식품 색소를 뿌려놓은 맛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옆 섬까지 방문해 찾아갔던 유명한 햄버거 가게의 햄버거는 속이 영 부실했다.
뻔뻔할 얼굴로 '내가 바로 유명한 맛집이다.'라며 당당히 서 있는 허름한 가게들. 평범한 맛. 내 입맛이 이상한 건가 싶을 정도로 맛집을 방문한 사람들의 줄은 길기만 하다. 더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이런 맛집들 대부분이 비단 한국 사람들에게만 인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관광객들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유가 뭘까. 한참이나 고민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누군가는 미국이 연방제 국가라는 점에 주목했다. 정부가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연방과 주 단위의 개성과 목소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각 지역의 작은 맛집들이 존속할 수 있단다. 거대 자본주의와 스타벅스 같은 글로벌 기업도 미국의 한 모습을 대변하지만 동네의 허름한 가게들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반전이요, 매력이란다.
내가 찾은 맛집들의 비법은 '뻔뻔함'이다. 나 맛집이야, 맛집이야, 맛집이다, 맛집이다,라고 끊임없이 우기는 뻔뻔함. 고집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사람들이 한 두 명씩 들르고, 갸우뚱하다가, 맛집이야?, 맛집인가 보다, 인정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특별하다 생각하게 되고 허름한 인테리어까지도 맛집이라 이런가 보다 수긍하게 된다. '나는 맛집'이라는 강한 자신감과 확신. 남들이 뭐라 하든 나 스스로는 내가 과연 맛집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딛고 끝까지 묵묵히 서 있어야 가능한 일들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는 것, 자신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 타인의 비판과 냉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제자리를 지키는 것. 가장 들기 쉬운 예로, 내 글쓰기만 해도 그렇다.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사람들이 읽어는 줄까? 책 한 권이라도 낼 수 있을까? 나는 글을 잘 쓰는 걸까? 온갖 의심과 불안, 이런 걱정들로 인해 초조해하며 오두방정을 떨다가 뭐 하나 해보지도 못한 채 다리에 힘이 다 풀려 나도 모르는 새 포기하는 과정. 지금까지 살면서 제풀에 지쳐 남들의 평가를 채 받아보기도 전에 나가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거 하다 저거 하다 저거 하다 이거 하고,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조바심으로 범벅돼 산만했던 지난 시간들.
그렇게 많은 오두방정을 떨고 그만큼 많은 실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하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꾸준히, 묵묵히, 하려고 했던 일을 끝까지 하자. 다짐을 '공식'으로 만들었다. 다짐이나 결심은 언제나 나의 의지와 관련돼 있다. 내 의지가 꺾이거나 약해지면 나와의 약속은 깨지기 쉽다. 그래서 아예 내 감정과 관계없는 공식을 만들었다. 이 공식은 정답이니까 다른 오답은 생각하지 말고 일단 공식대로 해보자. 속으로는 일희일비, 오두방정의 달인이지만 겉으로는 꾸준한 사람인 척, 태연한 척, 의연한 것처럼 행동한다. 내가 봐도 전혀 성과가 날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일을 당장에라도 덮고 새로운 일에 착수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굴뚝처럼 치솟아 오르지만, 일단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 보자. 매일매일 공식을 암기하고 공식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사실, 하와이 에세이가 생각보다 늦어진 것은 이 공식에 따라 되지도 않는 중편소설을 써보느라 혼자 낑낑대며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막 브런치가 처음 시작되고 많은 사람들이 에세이로 책을 내던 때, 나는 브런치에 글을 올릴 수가 없었다. 하와이에서는 취업비자가 없어 일은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취직을 할 수도 없었다. 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글쓰기를 선택했고 난생처음 중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에 대해 문외한인 생초보가 혼자, 그것도 단편이 아닌 중편 소설을 쓰자니 막막했다. 지치기 시작했고 그만두고 싶었다. 이걸 왜 하고 있나, 빨리 하와이 사진들을 정리해서 에세이를 쓰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A4 용지 42장, 6만여 자가 넘는 중편소설을 어찌어찌 마무리했다. 당연히 공모전에서는 떨어졌고.
저런 부질없는 일들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안 될 것 같으면 빨리 접고 돌아서는 게 낫지 애초에 계획했던 일이라고 모두 다 끝까지 마무리해야 하는지. 저런다고 글쓰기 실력이 갑자기 향상되는 것도 아니고.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차곡차곡 실력이 쌓이는 것도 아닐 테고.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중편소설을 쓰는 동안에는 공식을 나름 잘 지켰다는 점이다. 여전히 속으로는 답답하고 한숨이 나고 지겨워!, 못하겠어!, 소리치며 그만두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차분한 사람인 양, 묵묵한 얼굴로 한 편의 글을 완성했다. 뻔뻔한 맛집들처럼.
몇 번 공식을 반복하다 보면
허름한 맛집이 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공식이니까, 의심이나 고민은 필요 없겠지. 내 자리에서 오늘 하루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