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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 그늘 Aug 19. 2020

내가 너를 귀히 여기듯이

    산후조리를 해주러 오신 엄마는 간식으로 단호박죽을 종종 해주셨다. 단호박 두 통이 배달 오면 몇 시간 뒤 맛있는 죽이 용기에 알맞게 소분되어 있었다. 늦은 오후 허기질 때 덜어 먹곤 했는데, 수유하느라 돌아서면 배가 고프던 때라 단호박 두 통으로 만든 죽은 일주일이 채 안 돼 동이 났다.

    그렇게 두 번을 순환하고 세 번째 단호박죽을 만들 때였다. 냄비에서 죽을 젓던 엄마는 살짝 남편에게 와서 대신 저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 남편은 내게 슬며시 이런 말을 전하였다.


    "있지. 나는 단호박죽을 저으면서 어머님이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느꼈어."


    젊은 남자인 자신도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젓는 게 무척 힘들었는데, 웬만큼 딸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힘든 일을 몇 차례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 순간 눈치 없이 넙죽 받아먹고만 지냈던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죽 만드는 게 어렵지 않냐고 여쭤봤을 때 별 일 아니라는 손사래가 거짓임을 알아차려야 했는데. 그리고 속상했다. 나이 생각해서 적당히 하시라고 말씀드렸는데 왜 무리를 자처하시냐는 거다.

    남편의 얘기를 덧붙이며 이제 단호박죽 그만 먹어도 된다고 엄마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웃으며 예상치 못한 말씀하였다.


    "호호호. 내가 너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네 남편이 알면 좋지. 그럼 앞으로도 쭉 잘해주지 않을까."

    

      엄마는 이렇게 귀하게 여기는 자식을 소중히 대해주길 바라는, 어쩌다 전달된 무언의 메시지가 내심 좋았던 것이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말로서 실체를 드러내자 별달리 생각지 않고 살아온 엄마의 마음이 갑자기 커다랗게 느껴지며 코끝이 찡했다.


    하긴, 나와 얽힌 누구에겐들 이런 부탁의 말을 안 하고 싶었을까. 일하면서도 꼭 삼시 밥을 챙겨주시던 엄마, 수험생 시절 스트레스를 덜어주려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주시던 엄마, 멀리 자취하는 딸에게 줄 먹거리를 행여 샐까 몇 번을 싸매어 갖고 오셨던 엄마. 나는 이렇게 넘치는 사랑과 희생으로 귀하게 자라 세상으로 나왔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를 귀하게 대하지 못했던 날이 많았다. 은연중에 만만하게 대하던 사람들, 사랑받고 있지 않음을 알면서 억지로 이어가던 연애, 모멸적인 언사를 들으면서도 자리를 박차지 못했던 순간, 이에 분노는커녕 스스로를 탓하던 모습.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주눅이 들었고, 우울했다.

    지금도 그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을 보면 앞으로의 삶도 조그라든 모습을 펴기 위한 노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밝게 살아가려고 하는 데는 사랑을 받아온 기억이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날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내 딸 함부로 하지 말라' 말한들 먹힐 리 없다. 어떤 힘 있는 사람들처럼 자식 일을 전화 한 통으로 해결할 권력도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시절, 그 자체로 사랑받던 기억은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는 자존감이 되어 내 삶의 하방지지선을 만들어 주고 있다.   

https://pixabay.com/photos/mother-child-family-daughter-girl-3793521/

    더 이상의 단호박죽은 없기로 합의했지만 극진한 산후조리는 계속되었다. 손목이 안 좋아질까 우는 아이 엄마가 안아 달랬고, 함께 자며 밤 수유를 도와주셨다. 한기 들라 베란다 출입 금지, 눈 다칠라 스마트폰 자제 등 옛날식 산후조리 원칙도 더러 있었지만 그것들도 싫지 않았다. 십여 년을 떨어져 살다가 오랜만에 엄마 곁에 철석 붙어 사랑받고 지내는 시간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70여 일간의 긴 산후조리를 마치며 나는 엄마의 귀한 딸임을 다시금 새긴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엄마가 나를 귀히 여기듯이, 그리고 내가 아이를 귀히 여기듯이, 내 자신을 더욱 귀히 여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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