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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밀이다

존재의 참을 증명하는 삶

by 라라감성 Ma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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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딸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딸이 독서평설에서 본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대한 글을 읽었다고 했다. 나도 그 내용을 읽은지라 주인공이 겪는 구직 수당의 관료적 절차와 그 안의 모순을 이야기했다. 나는 문득, 작년 내가 겪은 일이 떠올랐다. 예술인 증명을 받기 위해 세 번이나 탈락하며 느꼈던 깊은 실의. “나는 예술인인데, 도대체 나를 더 어떻게 증명해야 해?”라는 절규는, 내가 나임을 증명받지 못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경험이었다.

한 예술인이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예술인 증명은 예술 활동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삶이 퍽퍽한지를 증명하는 과정 같아요...”
정말 공감이 되었고,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 둔 고흐의 말도 떠올랐다.


“밀은 밀이다.”
밀은 그 자체로 이미 밀인데, 왜 자꾸 밀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받는 걸까.
어떤 밀은 “내가 정말 밀이 아닌가?” 의문에 빠지고,
어떤 밀은 “내가 밀이라고!!” 외치고,
또 다른 밀은 그냥 묵묵히 살아간다.
이 끝없는 증명의 굴레 속에서 존재는 점점 지친다.

이야기를 들은 딸이 말했다.
“우리 수학 선생님이 그러셨어. 거짓인 건 하나의 반례로 쉽게 증명되는데, 참이라는 건 그걸 완전히 증명하는 게 더 어렵다고.”

순간 가슴이 멎는 듯했다. 맞는 말이었다.
거짓은 하나의 모순으로도 증명된다.
하지만 ‘참’이라는 것은, 모든 경우에 참이어야만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는 예술인이다”는 말은 서류 몇 장으로는 증명되지 않고,
“나는 밀이다”라는 선언은 삶 전체를 통과해야만 진실로 여겨진다.

그 순간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어떤 존재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 존재의 전 생애를 살아내는 일이다.”

나는 지금도 묵묵히, 내가 나임을 살아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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