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에서 보내는 주말
오전 8시 23분. 시계를 확인하고 다시 누웠다. 오늘은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토요일이 좋은 이유를 말해보자면 2박 3일이 걸려도 모자르지만 그중 제일은 안심하고 다시 잘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오늘은 평소보다 좁게 잤다. 다리를 나란히 하고, 팔을 붙이고, 벽에 붙어서 잤다. 어제 같이 잔 사람이 눕자마자 5초 만에 곯아떨어져 버려서 침대의 남은 틈을 찾아 들어가 잠을 청했기 때문이다. 그제 같이 잔 사람은 코를 너무 많이 골았다. 나도 한 코골이 하는데 걔는 진짜 심했다. 신기해서 코 고는 모습을 한참 쳐다봤다. 위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다.
요즘 나는 5초 만에 잠에 들고, 코골이가 심한 사람과 같이 잠을 잔다. 그의 옆에서 잠든 지 27년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엄마인 김정숙이다. 정숙과 같이 자면 보통 늦게 일어난다. 내가 잠이 많은 탓은 그의 유전자가 한몫했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우리는 주말이면 10시쯤 눈을 뜬다. 8시 23분은 일어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먹는다. 기지개를 펴고 하루를 시작한다. 이건 오늘을 꼼꼼하게 잘살아 보겠다는 의지다. 간단한 아침을 함께 먹는다. 점심에 더 가까운 시간이지만 정숙은 꼭 아침이라고 부른다. 일어나서 처음 먹는 끼니는 다 아침이란다.
우리는 같이 집안일을 했다. 흰 빨래와 검은 빨래를 나누고, 손상되기 쉬운 옷은 빨래망에 넣는다. 혼자 살 때는 집안일 하나하나 노동으로 느껴졌는데 정숙과 함께하니 퀘스트를 깨는 기분이다. 세탁기에 나머지 미션을 맡기는 사이 나가서 점심을 먹는다. 아침을 먹은지 1시간밖에 안 지났지만 이건 점심이라고 부른다. 그의 식사 명명 기준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까지 걸어간다. 시원한 바람이 코끝을 스친다.
D+100. 세어보니 익산에 다시 온 지 백일이 지났다. 날짜를 세어보는 건 연인과의 기념일 정도가 전부였는데 어쩐지 익산에 온 후로는 얼마나 지났는지 셈해보게 된다.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숫자를 더한다.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온전히 나를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정숙과 늦잠을 보내는 일도 나에게는 간단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나는 변덕쟁이라 집 밖을 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이 시간을 꼼꼼하게 기록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후엔 집 주변을 걸었다. 익산에 와서 가장 많이 한 일은 산책이다. 애정담은 시선으로 바라보니 20년 넘게 살았던 도시와 이제서야 조금씩 친해지는 기분이다. 집 주변을 걷다 보니 “모현초등학교”라고 써진 표지판이 보였다. 모교를 만난 반가움에 과감하게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길에 작은 미용실과 빛바랜 간판의 문구점을 지났다. 내가 다닐 적에도 있던 문구점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학교는 소꿉장난처럼 작았고, 깨끗했고, 불행은 없었다. 내게 익산은 마냥 걸으면서 곁에 서 있고 싶은 도시다.
대학교를 진학하면서 다른 도시에서 살았지만 쉬어감이 필요할 땐 종종 익산에 와서 머물다 갔다. 익숙한 집에서 익숙한 집밥을 먹으며 회복했다. 그럼 머문 기간만큼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는 기분이 든다. 정숙의 노동으로 대학을 다니며 정숙의 것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교육과 가치관을 쌓았다. 정숙은 무엇을 바라고 나를 가르쳤을까. 지금의 내가 나 혼자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집 근처 마트에 간다. 정숙은 나와 함께 장 보러 가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먹고 싶은 것, 그가 먹고 싶은 것을 가득 담은 장바구니 한 쪽씩 나눠 들고 집까지 걸어오는 시간을 좋아한다. 오늘은 블루베리, 사과, 과자, 아이스크림과 식재료 몇 개를 사서 걸어왔다. 이쯤에서 한 명이 이런 말을 해줘야 한다.
"아이스크림 먹고 잠깐 잘까?"
"그래!"
우리는 늦잠과 낮잠 사이에 열심히 움직인다. 그래야 낮잠을 더 잘 자기 때문이다. 오늘도 익산에서의 주말이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