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정도면 충분히 입을 수 있을 거 같아."
라고 말하며 친구가 청바지 하나를 주었다. 친구도 선물 받았던 건데, 가능할 것 같으면서도 끝내 입을 수 없는 사이즈여서 몇 번 시도만 해보았을 뿐 입고 나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나 역시 바지 속에 다리 하나를 넣어보는 순간 알았다.
'아니, 어딜 봐서 내가 이걸......'
검색해 보니 게스 청바지 중에서도 비싼 제품이었지만, 밝은 색에 다리품이 넉넉하고 길이가 짧은 맘진 스타일이어서 아이들은 안 입을 게 뻔했다. 주변에 줄만한 사람도 없고, 버리기는 아까웠다. 걸어두고 틈틈이 노려만 보다가 오늘 오전 공복에 입어보았다. 들어갔다. 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지퍼는 채울 수 있었다.
언젠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 집에서 소설을 쓸 때 청바지를 입고 썼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집이라도 편한 옷을 입고 쓸 때랑 기분이나 자세가 다르다고 했다. 청바지를 입은 채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밑위가 긴 청바지 덕분에 허리가 곧게 세워졌다.
'이런 자세 교정 효과가!'
살을 빼는 것보다 바지가 늘어나는 게 먼저겠지만, 이 정도라면 입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비록 비엔나소시지 같은 모양새일지라도 집인데 뭐.
얼마 전부터 나는 집에서도 티피오(Time 시간, Place 장소, Occasion 상황)에 맞는 옷을 입고 있다. 잘 때는 잠옷을, 운동할 때는 운동복을 입고, 평상시에는 티셔츠도 입지만 니트와 셔츠도 입고 그에 걸맞은 바지와 스커트를 입는다. 옷 정리를 하면서 외출복에서 강등된 것들이다. 입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보기 좋았다. 왠지 조금은 나 자신을 잘 돌보......기 까지는 아니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내친김에 그전에 입었던 편하기 그지없는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 나온 트레이닝 바지는 모두 정리했다.
요즘 나는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란 책을 읽고 있다. 처음 책의 제목을 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돈은 없는데 초라해지고 싶진 않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이런 신통방통한 제목의 책을' 하고 덥석 집어 들었다. 읽어보니 실천방법 보다 개념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있긴 했지만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꽃 한 송이를 온전히 즐기고, 집에서도 나쁘지 않은 옷을 입는 것이 그 책을 읽은 후에 나타난 효과이다. 유행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작게나마 나만의 가치를 찾아서 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