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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13. 2019

방을 나가지 않는 여행자

나의 여행을 완성시킨 문장들

나는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 것이다.


그건 내가 퇴사 후 쓴 책의 마지막 문장이었다. 작년 여름, 나는 그 간의 이십대를 한 책에 갈무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할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그때 나는 여행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어떤 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을 떠나는 자는 그 막연함에 생의 기대를 얹고 떠난다.


나도 삶의 모든 것을 캐리어 하나에 담아 떠나려 한다.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모든 것들 - 이전의 삶, 감정, 강박, 죄책감, 부담감 - 을 모두 버리고 나는 잭 케루악처럼 여행하고 버지니아 울프처럼 글을 쓸 것이다.

낯선 이름의 도시들은 모두 나의 방이 될 것이다. 그 방은 아늑하지만 낯설고, 불연속적이지만 영구적이고, 조용하지만 항상 선율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예상할 수 없는 것들 속에서 나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후의 삶을 살아갈 나를.     

-  <공채형 인간> 에필로그 中


내가 가장 먼저 떠난 곳은 미얀마의 수도 양곤이었다. 그건 다분히 조지 오웰 때문이었다. 캐리어에 꾸역꾸역 방 하나를 다 채우고 떠난 건 영화 <와일드>의 셰릴 스트레이드 때문이고, 우쿨렐레를 가져간 것은 잭 케루악처럼 길 위의 비트닉이 되고 싶어서였다. 무엇보다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은 나를 계속 낯선 방으로 떠밀었다. 나는 이들이 없어도 여행을 갔을 것이지만, 이들의 존재는 내 여행을 완성시켰다. 여행을 하는 도중에도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났다. 거의 방 밖을 나가지 않는 여행이었기에, 언제나 실존 인물보다는 책과 영화와 문장이 내 여행에 침입했다.


어쩔 땐 흐릿한 묘사보다 내게 영향을 준 문장의 나열이 더 명료하게 나를 보여주기도 한다. 나는 그저 수많은 문장의 집합체, 레퍼런스의 총체다. 여기에 그 문장들을 남겨 이 여행을 기록한다.

 





내게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방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논쟁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1년간 글을 쓸 수 있도록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학생, 취업 준비생, 직장인...  ‘공채형 인간’으로 살아온 이십대의 시간을 뒤로하고 나는 나를 다시 정의해야 했다. 삶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나를 알아볼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다. 시간이 없어서, 체력이 없어서 못한다는 핑계는 던지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당시 영국의 지식인들은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와 가정의 도움을 받고 많은 참고문헌을 사용하며 ‘논문’을 쓰지만, 여성들은 참고문헌이 필요하지 않은 ‘소설’을 쓰는 것을 지적했다. 우리가 사유하고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독립, 연속적인 장소, 충분한 시간이다.


1년의 유예 시간, 어쩌면 체감 500파운드쯤 될 퇴직금. 이쯤이면 나도 자기만의 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버지니아 울프는 장소의 연속성을 지적했지만, 불연속적인 도시에서도 연속적인 나만의 방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왜 하필 떠나야 하나요?

버려진 존재가 되기 위해


“오직 밤에만, 밤에는 나는 나 자신이며, 다른 모든 사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잊힌 존재로, 버려진 존재로 있을 수 있다. 현실과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은 채, 그 어떤 세상의 소용과도 무관한 채, 나는 오롯이 나로 있는 나를 발견하며, 위로를 얻는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버지니아 울프는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잠겨진 방 (a room of her own with a lock)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가 문을 걸어 잠그지 않으면 현실이 계속 방문을 쾅쾅 두드린다. 그런 방에서는 페소아가 말한 고요한 밤을 가질 수 없다.


나는 아주 긴 밤을 갖고 싶어서 여행을 한다. 모든 사람과 사물로부터 버려진 존재가 되기 위해 여행을 한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어서 현실의 나를 방문에 걸어 잠근다. 비현실의 세계에서는 내가 꿈꾸는 나를 시도할 수 있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짊어들고


영화 <와일드> 속 셰릴 스트레이드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짊어들고 여행을 떠난다. 평론가 김혜리는 이 영화를 보고 이런 평을 남겼다. “짊어질 수 있는 부피를 넘어선 물건은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소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 예기치 못한 위안을 주었다” -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동명의 논픽션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 <와일드>는 셰릴 스트레이드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4285km에 달하는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을 걸어서 여행한 셰릴은 김혜리의 말마따나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을 짊어들고 여행을 떠난다.


여행 짐을 싼다는 것은 앞으로 내게 주어질 시공간에 필요한 것을 정리하는 작업이며, 그 작업 자체가 여행의 성격을 정해주기도 한다. 당시 나는 은평구의 월세집을 빼고 여행을 떠나는 상황이었기에, 짐싸기에는 ‘과거의 파기’와 ‘미래의 설계’ 두 가지 기술이 모두 필요했다.


영화 <와일드>


나는 돌아올 곳이 없는 사람처럼 짐을 쌌다. 영화 속에서 셰릴의 엄마는 “일출과 일몰은 매일 있으니까 니가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행이야말로 그 마음을 먹게 해준다. 정리 못한 수많은 삶의 족적을 부모님과 친구의 집에 맡기고 오긴 했지만, 적어도 여행길은 셰릴처럼 가볍고 후련하게 떠나야 했다. 그간 나의 어깨 위를 무겁게 짓눌러온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자신의 경계를 깨닫는 여행


타자에게 관찰당하지 않은 사람은 제 나라를 제대로 알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문제를 다른 시각에서 생각해보도록 도와준다. 그들은 문제를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은 해결의 선결 조건이다.

우리는 타자와 만남으로써, 또한 스스로 타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경계를 깨닫는다. 정체성은 우연한 것이자 상호적인 것이다. - 앤드류 솔로몬, <경험 수집가의 여행>


여행지에 도착해서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이 어색한 도시에 익숙한 나만의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작업에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어짜피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그것이야말로 언제나 여행의 본질이다.


여행에서는 나는 타자라는 것을 깊히 인식한다.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고, 산책을 하는 나’가 아닌, 커피를 마시는 한국인, 글을 쓰는 여행객, 산책을 하는 이방인으로써 나를 본다. 그런 상태에서는 유독 타자가 더 잘 보인다. 길에서 읽은 앤드류 솔로몬, 고병권, 기시 마시히코의 책은 모두 내게 같은 조언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타자와 만나는 기쁨을 얻는 것이라고. 여행은 스스로 타자가 되고 타자를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철저하게 나의 경계를 깨닫기를. 자아의 경계,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 기득권과 마이너리티의 경계, 타자의 경계. 그 모든 경계를 인식하지만 그것을 자유롭고 산뜻하게 넘나드는 무경계의 사람이 되기를. 그런 지적으로 말랑말랑한 상태에서라면 앤드류 솔로몬처럼 “진단은 덜 내리고, 질문은 더 잘 던지고, 답은 성급히 내지 않기”를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글쓰기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 조지오웰, <나는 왜 쓰는가>


불연속적인 도시의 연속적인 방에서 내가 제일 하고 싶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그간 내게만 집중해온 이기적인 글을 벗어나, 세상을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치열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조지 오웰이 말했던 것처럼, 미학적이고 지적인 진정성을 희생하지 않는 글.


내가 여행 중에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햇살이 비추는 편안한 오후 네시에 커피메이커로 내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글을 쓰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내가 해야하는 것이 많다. 나의 무지를 채우기 위한 수많은 읽기와 공부의 연속... 보잘것 없는 그 공부의 끝을 글쓰기가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항상 책상 위에 앉아서 쓴다.


위대한 사상가의 작품들이 미완인 이유는 그들이 끝까지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편향이 담긴 글을 쓰는 삶,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삶을 살고 그런 글을 쓰는 삶이라면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미얀마를 첫번째 여행 국가로 정한 이유도 조지 오웰의 글 때문이었으니, 나는 그에게 여러모로 빚을 진 셈이다.




그래서, 여행은 어떻던가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이느냐


모하비 사막을 지나갈 때 우리들의 사랑이 얼마나 추상적이었나를 깨달으리라. 몬순풍이 불어오는 멕시코만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선인장들을 간간히 보리라. 울지 말아라. 가시투성이 그대가 홀로 남아 사막의 주인이 된다면 기쁘지 않겠느냐. 저 농염의 햇살이 작은 풀잎의 그늘까지 파고들어 오금을 떼지 못하는 뿌리 곁에 누우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이느냐. 우리의 속삭임이 얼마나 분명하게 들리느냐. 그 어떤 뜨거움으로 불러도 껴안지 못하고 그리움 사무친 가시를 매단 채 우리의 사랑은 지금 사막의 중심을 걸어가고 있다. ―권운지 '사막의 사랑', 시집 <갈라파고스>


언제나 뜨거운 라스베가스의 사막 위에 우연히 바그다드 카페를 발견한 야스민같은 여행을 하고 싶었다. 여행자 수표와 커피머신,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찬 캐리어를 가지고 지루한 모텔 겸 카페에 도착한 야스민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자주 위로를 받았다.


스스로 타자임을 인식하는 곳 위에서는 나를 절대로 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강렬한 고독감을 동반한다. 출발 자체가 나를 슬프게 만들지만 영화 속 노랫말처럼 “모든게 마법 같아서 슬플 일은 없다.” 내게 주어진 관대한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저 나를 뚜렷히 마주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인 한, 나는 이 외로움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다.


나의 여행은 습한 치앙마이를 가도, 쌀쌀한 리스본에 가도 언제나 황량한 모하비 사막에 있는 것 같다. 뜨거운 모하비 사막의 몬순풍이 불어오는 황량함 속에서 나는 권운지의 시처럼 내 삶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보인다. Calling you의 가사처럼, 곧 이 계절풍을 타고 달콤한 해방으로 이끌어 줄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But we both know a change is coming
Coming closer sweet release
- Calling You - Jevetta Steele (바그다드 카페 中)


영화 <바그다드 카페>





지금 머무는 포르투갈을 훗날 어떻게 기억할까. 어떤 곳은 세일러문에서 볼 법한 낡고 빈티지한 열쇠, 어떤 곳은 딱 나와 캐리어만 탈 수 있는 좁은 엘리베이터로 기억될 것이다. 어떤 곳은 그날 내가 누웠던 침대의 크기로, 그때 들었던 플레이리스트의 노랫말로 기억될 것이다. 방콕은 짜오프라야 강 위에 지어진 수상 가옥의 비릿한 물냄새로 기억될 것이고, 만달레이는 빛이 전혀 들지 않았던 어두컴컴한 호스텔로, 양곤은 엘리베이터가 없어 내 짐을 옮기는 벨보이에게 연신 쏘리를 외친 3층의 호텔로 기억될 것이다. 내게 여행지는 그런 식이다. 도시나 나라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고양이나 샹들리에의 존재가 더 확실하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내가 지금 여기에 와있다니!”라는 존재의 확실한 각인이다.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 시기에, 이 땅위에 서있다니. 시공간의 갑작스런 변화 속에서는 시공보다는 ‘나’라는 존재를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내가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숨쉬는 것이 신경쓰이는 것처럼, 그런 자의식이 생기면 가장 중요한 동사가 방해받는다. '숨쉬다'와 ‘여행하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그 곳에 익숙해질 충분한 시간을 들여 루틴을 만드는 것이다.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는 흥분을 가라앉히는 적응의 시간이 없으면 새로운 경험을 할 여유가 없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달간 머무를 이 숙소와 주변에 익숙한 것들을 만드는 일. 숨쉬는 것을 다시 까먹을 수 있도록. 여행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런게 적응이 되고 나서야 완벽한 날씨와 동선을 찾아 답사를 나간다. 물론 저녁엔 다시 또 골방에 처박혀 글을 쓴다.


확실히 나는 방을 나가지 않는 여행자다. 이건 실제로 내가 방을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모든 여행이 자기만의 방을 찾기 위한 여행이라는 의미도 있다.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나의 불연속적인 방을 만드는 일, 흩어진 공간을 합치는 일, 그 곳에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별난 일상을 반복하는 일.


결국 모든 곳에서 나는 하나의 방을 만난다. 낯선 도시의 불연속적인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변하지 않는 아늑한 자기만의 방을 발견한다. 그 곳에서 나는 수많은 문장을 읽고 써야하는 것을 쓴다. 어떤 이야기는 떠난 후에야만 쓸 수 있다.




19.02.13 in Porto

여행 177일 째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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