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이미 워킹그룹장에겐 말을 했고, 요즘 사원 대리 평가 면담 기간이라 겸사겸사 먼저 팀장님에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팀장님 혹시 오전에 잠시 면담 가능하신가요?” 이 말을 내뱉을 때부터 온몸에 우수수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면담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이미 나의 퇴사 이야기를 매우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메신저로 난리를 쳤다. 야 어떡해, 나 지금 말한다. 헐 미친. 벌써? 잘 말해. ㅇㅇ. 아 너무 떨려.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퇴사에 관한 수많은 글을 볼 때마다 대리 희열을 느꼈던 그 말, 나도 팀장님께 잘 말할 수 있을까? 이미 팀의 친한 대리님과 과장님, 차장님 한 분에게 이야기를 했으니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감은 잡혔다. ‘새로운 분야로 도전하고 싶다… 입사 이후로 직무에 대해 많이 고민해왔고, 수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잘 마무리하고 나가겠다… 감사했다…’ 동기들에게도 몇 번의 모의 면담(?)을 통해 조언을 구했다. 퇴사 후 계획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고, 결심을 단호하고 진중하게 말하는 게 중요해 보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면담을 하는 한 시간 반 동안 펑펑 울었다.
회의실에 마주 앉고 나서, 몇 초간 무슨 말을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속없는 사람처럼 웃음만 몇 번 터트렸다. 팀장님은 생각이 많은 얼굴로 조용히 웃고만 계셨다. 내가 계속 “하하, 아 어색하네요 팀장님”하고 변죽을 울리고 있자 팀장님은 "네가 무슨 말할지 안다"라고 말했다. 나는 머리가 새하얘져서 이전 면담에서 어떻게 말을 꺼냈는지만 되짚어 봤다. 아 어떡하지, 큰일이다,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아 …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 이상한 문장을 내뱉으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기 시작하는 날 팀장님은 조용히 보고 계셨다.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던 퇴사 이후 진로 고백도, 어쩐지 기나긴 시간이 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정리되지 않은 문장을 계속 잇고 붙여서 고민과 진심들을 전했다. 어떤 고민을 해왔는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대충 에둘러서 말하는 건 날 알고 지낸 팀장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팀장님은 날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내 이야기를 쭉 듣고 있던 팀장님이 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어?”
“네? 버틴다는 게..”
“경제적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냐고. 1년은 버틸 수 있어? 사원 3년 차가 돈을 얼마나 모았겠냐. 먹고 여행 가고 하는데 돈도 없을 텐데..”
그리고 팀장님은 말했다.
“너의 미래에 대해 조언해줄 사람은 있었어? 너는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잖아.”
팀장님은 내가 면담을 신청하자마자 "네가 이 직무로 온 게 잘못이었는지, 네가 다른 직무를 경험했으면 달랐을지, 회사 안에서 너랑 잘 맞는 직무가 뭐가 있을지부터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결정한 지 안다며, 너의 가치관과 꿈은 회사 밖에서 이룰 수 있는 것 같다고 응원해주었다. 팀장님은 나의 길을 가는데 조언을 받을 사람은 있었는지, 롤모델은 누구인지를 계속 물었다.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전하면서.
“너는 잘 돼야 하는데. 네가 여기서 어떻게 클지 궁금했는데.
그래도 힘들게 살지 마. 어렵게 가지 마”
당연히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회사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게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다. 나가는 팀원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인생의 후배에게 삶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팀장님이기에. 경제계획이 없고, 혼자 고민하고 삭히고, 남들과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나의 여러 단점들을 정말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내게 주는 애정 어린 조언들을 들으며 나는 화장이 클렌징 오일로 닦은 마냥 눈물로 깨끗이 지워지는 걸 느꼈다.
“네가 과장되는 모습이 궁금했는데.”
“팀장님은 항상 제가 과장되는 거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팀장님은 언제나 내가 조직의 반동분자(?)가 될까 봐 걱정했다.
“그래도 너 이제는 할 말 안 할 말 사람마다 가릴 줄 아니까”
사실 팀장님이랑 면담하며 운 게 첫 번째는 아니다. 몇 년 전 첫 고과에 C를 받고 면담할 때도 팀장님 앞에서 펑펑 울었으니까. 면담할 때도 팀장님은 그때 얘기를 꺼냈다.
“C 받았다고 울었던 애가 밖에 나가서 잘할 수 있겠냐.
회사 밖은 더 힘들 거야”
나를 잘 알고 있고, 항상 힘을 실어준 어른에게 이제 팀장님이 없는 곳에서 살아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아 정말, 정말 이제 끝이구나 싶어서. 이런 좋은 사람들이 있는 조직에서 내가 정말 나가는구나 싶어서. 진짜 혼자가 되는 게 느껴져서.
그렇게 한 시간 반 동안 별별 얘기를 했다. 내가 팀장님께 궁금했던 것들, 팀장님이 내게 궁금했던 것들.
“팀장님 저는 왜 사람들이 다 저처럼 일하지 않나 빡칠 때가 많았어요. 저는 일할 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타입이더라고요. 협조를 구할 때도, 일을 할 때도…. 근데 그렇게 일을 안 하는 사람도 많고, 스트레스 안 받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주위 동료에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일희일비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네. 나도 일희일비하는 사람이야.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나도 그래서 피를 많이 봤다. 너도 알잖아. 일할 땐 일희일비해야 해.”
“저보다 후배들 중에서도, 직무에 애정을 가지고 커리어를 쌓아가고 싶은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어요. 저 같은 경우엔 이 직무가 회사 안에서는 좋지만, 더 잘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더 재밌게 일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계속 고민했거든요. 입사 이후로 항상 일과 삶을 분리하려고 애썼는데, 이제는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아도 좋으니 제가 미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팀장님은 일이 재미있으셨어요?”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했지. 회사가 나에게 준 게 많고, 기회를 너무 많이 받았으니까. 장(長)이 되고서 이제 일은 재밌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래서 항상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했어.”
“회사는 변하고 있다고 느껴?”
“요즘에 친구들이 많이 퇴사하지만, 저는 입사한 이후로 일하기는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작지만 변하고 있으니까.”
“나도 변화하는 건 느껴. 조금씩 변하고 있지. 그런데 사원 때는 과장이 되면, 과장 땐 팀장이 되면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들이 아직 바뀌지 않은 게 많아.
변화는 하고 있지만 변화의 속도가 느려. 왜 그럴까“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요. 저만 해도 불과 1년 차이나는 선배에게 비효율적인 업무 방식에 대해 말하지 못하거든요. ‘네가 뭘 안다고 얘기해?’ 이런 말을 할까 무서운 거죠. 직급이나 나이에 상관없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개선점과 아이디어에 대해 말할 수 있고,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물론 리더가 바뀌어야 조직문화가 바뀐다고 얘기하는데, 또 이상한 리더가 오면 다시 돌아가잖아요? 한 명의 리더보다 중요한 건 다수의 이야기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돌아다니는 분위기인 것 같아요.”
“회사에서 좋은 리더를 보기도 어렵지”
“왜 좋은 사람이 리더가 되기 힘들까요?”
“나도 그걸 많이 생각해봤는데, 좋은 사람은 변화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을 마련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윗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은 예! 바로 하겠습니다! 당장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을 원하지. 그래서 이상한 사람이 계속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아.”
“팀장님이 더 높은 리더가 된다면 팀장님이 좋은 사람이 아니어서 일까요, 아니면 예상하지 못한 변수여서 그럴까요?”
“둘 다.”
“팀장님은 어떻게 늙고 싶으세요?”
“자유롭게 늙고 싶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선택에서 자유로운. 은퇴하면 봉사활동도 하고 싶지. 너는 어떻게 늙고 싶은데?”
“늙는 방식은 팀장님처럼 자유로웠으면 좋겠어요. 선택지가 다양한. 예측할 수 없는. 그렇게 늙어서 최종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은 관대한 사람이요. 나와 다른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시야를 가진 사람.”
“결혼은 하고 싶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기혼자의 삶이 궁금해서 해보고 싶을 때는 있어요.”
“아기는?”
“아기는 진짜 생각이 없어요. 결혼해도 딩크일 것 같아요. 아기를 너무 사랑해서 나라는 우선순위를 뺏길까 봐도 무섭고, 아니면 생각보다 아기를 좋아하지 않을까 봐도 무서워요. 생명을 기른다는 것에 자신이 없어요.”
“술 한 번 사주셔야죠”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팀장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나는 생각이 많을 땐 술을 안 마셔.”
그래서 그 날은 나도 술을 먹지 않았다. 생각이 참 많은 날이었다. 사실 면담을 하고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쩌면 퇴사한다는 결심이 가장 흔들린 순간이었다. 나를 지지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난 잘할 수 있을까. 과장이 된 내 모습이 궁금하다는 팀장님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저도 그게 궁금해요. 이 선택이 맞는 건지 항상 의문이에요. 그러나 되돌릴 수 없는 선택에 주저함이 찾아온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왜 나가기로 한 거야?
어떤 일을 하고 싶어?
니가 좋아하는 게 뭐야?
어떤 삶을 살고 싶어?
어떻게 늙고 싶어?
수많은 질문의 끝에 이 선택이 있었다.
지금은 분명히 도약의 순간이다.
내가 내뱉은 말이 쪽팔리지 않게 살자.
그러면 언젠가 다시 만날 때도 부끄럽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