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재에 만난 사람
처음에 정희 언니 이름으로 온 20만 원의 부의 봉투를 발견하고는 의아했다. 대부분의 친척과 인연을 끊은 정희 언니의 부조금을 누가 대신 넣어줬을까. 엄마랑 가능성 높은 사람을 세어봤지만 썩 적당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는 정희 언니의 남동생인 명완 오빠를 잠깐 부엌 뒤로 불러 속삭였다. "네가 정희 대신 부의했어?", "숙모, 저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오래됐어요." 작은 고모에게 물어 간신히 정희 언니의 전화번호를 얻었지만 부의를 대신 내지는 않았다고 했다. 연락은 무슨, 작은 고모도 정희 언니와 연 끊고 산지 오래였다.
정희 언니는 나와 사촌지간이지만 오십 대의 중년 여성이다. 5남매 중 막내였던 나의 아빠가 늦은 나이에 결혼한 탓이다. 정희 언니는 첫째 고모의 딸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첫째 고모에게는 정희 언니를 포함해 네 명의 자식이 있다. 그들은 모두 정희 언니와 연락을 끊었다. 돈을 아주 많이 빌렸다고 했다. 작은 고모에게도 얼마를 빌렸는지, 고모부가 쓰러진 후 지병이 심해진 것도 정희가 사고를 쳤기 때문이라는 말을 장례식장 안에서 어깨너머로 들었다.
"우리 집이 돈이 없었으니까 정희가 안 빌린 거지. 아빠한테 돈 있었어봐."
어느 집안에나 있는 사고 치고 다니는 골칫거리, 정희 언니는 그런 존재였다. 엄마는 정희 언니를 얼굴은 반반하고 성격은 착했으나, 낭비벽이 있다고 회상했다.
"낭비벽을 어떻게 알아? 뭐 비싼 가방이라도 매고 다녔어?”
"딱 봐도 알지. 하여튼 그런 게 있었어"
돈을 얼마나 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안에 조금이라도 있으면 빌리고 안 갚고 사라지기를 반복한 정희 언니는 언젠가부터 집안의 금기어가 되었다. 정희 언니가 이혼을 했는지, 남편이랑 같이 사는지, 아들은 어디서 사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정작 피해본 사람들은 속이 터져 삼키지 못하는 말들을 제삼자의 위치에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가 보기엔 콩가루와 불행으로는 우리 집도 못지않았지만, 그래서 정희 언니라는 존재가 엄마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가장 최악의 집안꼴은 면했다는 값싼 위안.
친지들은 정희 언니가 아빠랑 가장 각별한 사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아빠는 그전까지는 할머니와 첫째 고모와 살았다고 했다. 그때도 언제나 정희 언니를 딸처럼 싸고돌았다면서. 정희 언니와 남매인 사촌 오빠는 첫째 고모부도 일찍 세상을 떠나 아빠가 호랑이 같은 삼촌 노릇을 톡톡히 했다며, 아빠에게 맞고 자란 것이 트라우마가 됐다는 소리를 우스갯소리처럼 꺼냈다.
"정희가 여자기도 하고 이상한 놈팽이 만나고 다닐까 봐 아빠 노릇 대신하며 엄하게 관리했지, 삼촌이"
그러고 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결혼 이전에 아빠가 누구와 어디서 살며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해본 적 없었다. 분향소에서 조문객을 기다리는 이틀간, 사촌 오빠와 아빠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집에 여자뿐이라 사촌 오빠가 대신 두 줄짜리 상주 완장을 찼다.) 내가 아빠가 요리를 참 잘했다고 회상하니, 사촌 오빠는 "내가 생각하는 삼촌은 절대로 집에서 요리할 분이 아닌데, 정말 신기하다"며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사촌들을 혼내는 아빠를 생각하며, 결혼 이전의 아빠, 아빠가 아닌 아빠를 잠시 상상했다.
아빠의 유품에서도 정희 언니의 어릴 적 사진이 자주 나왔다. 나는 정희 언니에 대한 기억이 희미했다. 초등학교 때 장례식이나 팔순 잔치같은 가족 행사에서나 몇 번 봤던 기억이 났다. 언제는 남편이 있었고, 언제는 남편이 없었다. 삼우제 다음 날, 부의금 명단을 엑셀로 정리하고 단체 문자를 발송하는 웹사이트에 접속해 일괄 문자를 보냈다.
< … 다시 한번, 애도와 정성 어린 위로로 저희 가족을 보살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리며, 오래오래 마음속에 간직하겠습니다. 그리고 댁 내에 애/경사가 있을 때 보답의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댁내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하루가 지나 정희 언니에게 문자가 왔다.
< OO야 정희언니야.. 뭐라고 말을해야 할지 삼춘이 돌아셨단말을 듣고는 내가 힘들단이유로 안부전화도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너무 죄송하고 속상했는데.. 또 어렵게 일하게된 매장사장님께서 6일날에 유럽을 가셔서 내가 매장을 맏아서 마감 까지 해야될 상황이어서 명현이 오빠한테 우선 인사로 먼저드리고 49제때 꼭옥 찾아 뵌다고 숙모께 말씀드려 달라고 애기했는데 애길 안한거같아 OO야..! 삼춘은 누구보다 언니에겐 아버지같은분이 셨어 때론 무셥게 혼두내시지만 정말로 우리정희 하시면서 아끼고 사랑해주셨는데.. 찾아뵙지도 못하고 어떻하니... 이번49제때 꼭옥뵙고 인사드리고 삼춘뵙고 올꺼야 그때 얼굴 보았음 좋겠다 >
내가 보낸 장문의 인사말에 장문의 답신이 온 것이었다. 이후 나는 정희 언니와 몇 번을 문자를 주고받으며, 정희 언니가 절대로 전화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지 않았기에 의아했다. 전화하기를 무척 어려워하는 나는 할 말과 예상 답안까지 정리해서 한 번의 긴 문자를 보내는 편이다. 텍스트의 의도가 왜곡되지 않게 중언부언 말을 덧붙이다 보면 어느새 메시지가 한참 길어져 있었다. 그러면 문자를 받은 사람들은 '글자가 안 보인다, 이렇게 문자할 거 그냥 전화해라, 말로 하는 게 더 편하다' 하면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도, 명완 오빠도, 산재 신청을 맡긴 노무사도, 항상 내 긴 문자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벨소리가 들리면 나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댔다.
정희 언니는 언제나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가벼운 질의응답과 근황을 여러 번에 나누어 주고받는 그런 식의 대화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본인의 근황과 목적과 안부와 기승전결을 하나의 메시지에 몰아넣은 뻑뻑한 문자였다. 그 문자들을 보며 나는 어쩌면 부모님보다 정희 언니와 더 비슷한 점이 많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삶이 자주 숙제처럼 밀려 버겁게 인사가 쌓인 사람들은 생각할 뜸이 필수적이었다. 정희 언니와 나는 뜸의 시간이 자주 필요한 타입이었다. 한 번의 전화에 무너지지 않도록.
나는 정희 언니로 저장된 번호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확인했다. 프로필 문구는 아빠에게 쓰는 메시지였다.
< 삼촌.. 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
지난 프로필 기록을 보기 위해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계속 내려니 수없이 많은 프로필 문구가 보였다. "넌 이제 노땡큐”같은 저격 글도 많고, "자존감 도둑 떠나보내기"나 "대꾸할 가치가 없을 땐 그냥 웃기"같은 심리학 서적 조언 같은 문장이 타임라인에 가득했다. 20자 내외로 이 공간에 화풀이하듯 쌓아온 프로필 문구를 보며 나는 이 문장을 원래 받았어야 할 주인들을 생각했다. 수취인불명이 된 리스트에는 아빠도 있었다. 제때 말하지 못해 언제나 뒤늦게 감정이 폭발하고, 어디에 말하지 못하는 감정을 자기 공간에 글로 쌓아두는 정희 언니는 내 거울 같았다.
한 달 후에도 어김없이 문자가 왔다.
< OO야 정희언니야~ 날이 많이덥다 삼촌이 돌아가신지도 한달이 되어간다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고 그리 허망하게 가실줄은 꿈에도생각하지도 않고 항상 든든한버틱목이 되어주실줄만 알았어 아빠 영정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준걸보곤 매장문잠가 놓고 한참을 울었다 OO야.. 우리 삼촌도 많이 늙으셨네 하구 정말 힘들단 이유로 찾아뵙지 못한게 너무너무 죄스럽다.. 49제 날짜가 정확히 언제야 OO야?>
전화를 아끼고 문자로 꾹꾹 담는. 아빠의 장례식에 오지 못한. ‘꼭’ 대신 ‘꼭옥’이라고 쓰고, 맞춤법을 자주 틀리고, 그저 쓰이는 대로 확인 않고 문자를 보내는. 추모공원에, 49재에는 꼭 오고 싶다며 문자로 언제 가냐, 어디로 가야 하나 물어보던 정희 언니. 나는 정희 언니의 일방적으로 할 말이 담긴 장문의 메시지를 통해 언니의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의류 매장의 작은 공간 한켠에서 숨을 죽이고 핸드폰 사진을 들여다보며 꺽꺽이기를 반복하는 마른 중년 여성을.
그렇게 49일 동안 나는 정희 언니와 길고 무거운 문자를 띄엄띄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정희 언니가 친척에게 아빠의 부의금 이십만 원을 부탁할 때도 장문의 문자를 보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일은 거진 10년 만에 정희 언니를 본다. 먼저 정희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어느 역에 몇 시에 도착하세요? 엄마가 내일 데리러 가신대요.>
우리는 어쩌면 말하는 방법을 까먹어서 한참 조용할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우리는 어색하게 마주 볼 필요가 없다. 대신 아빠 앞에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설 것이다. 전화가 서툰 사람들끼리. 제자리에 맴돌며 장문의 문자를 쓰는 사람들끼리. 부치지 못할 말을 쌓아두고 사는, 남겨진 사람들끼리.
(2019.7.26)
*실명을 쓰지 않았어요.
매거진 소개 ⎮ 이것은 애도가 아니다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빠의 삶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같지도, 내 삶은 <애도일기>를 쓴 롤랑 바르트 같지도 않았다. 이것은 애도의 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빠가 죽은 후 진동하는 삶의 기록, 죽음과 삶에 대한 엇갈린 고찰, 남겨진 자가 삶을 처리하는 서툰 기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적절한 애도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오길 바란다. 프롤로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