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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Jan 16. 2020

용돈 100만 원의 슬픔

나는 절대로 쓸 수 없는 돈

눈을 뜨면 오늘은 어느 기관에 방문해야 하는지 헤아린다. 망자의 신변 정리를 위해 처리해야 할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직장에 나가는 엄마와 동생 대신, 모든 일은 내가 맡게 되었다. 이를테면 노무사에게 요청받은 서류(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내역서, 소방서의 119 구급구조 증명원, 이를 위한 정보공개 신청, 회사의 근로계약서와 급여대장, 과로 스트레스 입증 자료, CCTV, 동사무소에서 수없이 떼도 모자란 가족관계 증명서, 의료기관의 사망진단서와 의무기록 등…. 나도 알고 싶지 않았어)를 떼기 위해 행정 기관을 돌아다니는 일이다. 공단과 보험사, 동사무소,  노무사 사무실에 밥 먹듯 가다 보니 단순 외출을 할 때도 아빠 신분증과 사망신고서, 가족관계 증명서를 챙기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관련 서류를 떼러 왔습니다.”라는 말은 반복해도 입에 붙지 않는다. 어색함을 피하려고 단어나 순서를 바꿔봐도 그렇다.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사망자 가족인데요, 망자 행정처리를 위해서요, 부모님 관련해서 왔는데요- 사망하셔서요. 행정처리를 위한 사무적 태도와 고인의 가족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 사이에서 나는 갈팡질팡한다. 너무 괜찮아 보이지도, 그렇다고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정도로 감정적으로 보이기도 싫다. 이런 과도한 자의식은 어디서 왔을까. 요즘 내가 사람을 분류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가족을 잃은 사람, 잃지 않은 사람.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에서의 대화 방식을 잊어버린다.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대부분의 업무는 혼자 발품을 팔면 그만이다. 그러나 은행 업무는 혼자 할 수 없다. 망인 통장의 잔액 이체를 위해서는 상속 대상이 되는 모든 인원이 한꺼번에 가거나, 대표 1명이 직계 존비속의 위임장을 모두 받아 수많은 서류를 준비하는 방식이 있다. 널린 게 시간인 우리 가족은 전자를 택했다. 매주 수요일은 다 같이 은행 업무를 처리하는 날이 되었다. 동생이 집에 오고, 은행 문 닫을 시간을 계산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반 정도다. 이번 주는 신한은행에 갔다. 얼마 안 되는 통장을 같이 확인한 후, 엄마는 ATM 기계에서 잠깐 돈을 뽑겠다며 나보고 먼저 차에 가있으라고 떠밀었다. 잠시 후, 두둑한 돈 봉투를 들고 돌아온 엄마에게 장난을 쳤다.


“웬 돈봉투? 내 용돈인가?” 

“어 니 용돈”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엥? 나 장난인데?”

“아니야 원래 주려고 했어 받어”

“뭔 소리예요 나 돈 있어요. 용돈 왜 줘요 됐어”

“받어 그냥 쫌. 너 고생했잖아”


당황스러웠다. 내일모레 서른인데 용돈을 드리지 못할 망정 받고 있다니. 엄마는 노무사에게도 돈 백 주는데 너한테 못주겠냐며, 5만 원권이 빼곡히 담긴 신한은행 봉투를 건넸다. 매일 카페에 갈 때 커피값 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너 카페에 오래 있잖아. 한 잔 말고 두 잔씩 마셔” 엄마는 내가 최근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험과 산재신청을 위해 아빠의 죽음을 설득하러 다니는 것은 내면을 매우 소모시키는 일이었다. 나는 계속해서 용돈을 사양했고, 엄마는 계속해서 받으라며 재촉했다. 서로 별일 아닌 듯 말했지만 차에 감도는 묵직하고 어색한 공기를 감출 수 없었다. 소음이 절실했던 나는 에어컨 바람을 세게 틀었다.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조수석 창 밖만 봤다. 용돈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우울하고 울컥하는 일이었나. 앞으로의 계획이 잘 될 거라고 믿는, 대책 없이 낙관적인 내 민낯에 100만 원 용돈 봉투가 귀싸대기를 때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게 위조나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던 <기생충>의 아들이 생각난 건 왜였을까. 나의 계획은 어쩌면 나만 모르는 위조나 사기였을지도 모른다.




최근 엄마의 직장 동료의 부친상이 있었다. (부고라는 것은 한번 들리면 끊임없이 들리는 법칙이라도 있는 것 같다.) 기덕 씨는 31살이다. 엄마는 내게도 종종 기덕 씨에 대해 얘기했다. 엄마를 통해 듣는 기덕 씨는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회식을 하며 먹는 모든 음식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라며 신기해한다. 스타벅스 커피도, 크림 파스타도 먹어본 적 없는 기덕 씨는 뜻밖에도 두리안은 먹어본 적은 있다. 베트남에 잠시 있었다나. 기덕 씨는 회식도 몇 번 나오다가 언제부턴가는 나오지 않는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만원으로 일주일을 버티고, 더운 여름에도 여름옷이 없어 목 끝까지 올라오는 목티를 입는다. 회사 점심시간에는 밥을 식판에 수북이 쌓아 게걸스레 먹는다. 집에서는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전투식량을 쟁여둔다. 엄마는 내 동년배인 기덕 씨가 눈에 계속 걸린다고 했다.


언젠가 엄마는 어쩌다 얻은 전자레인지를 기덕 씨에게 주려고 했지만 기덕 씨는 거절했다.


“전자레인지를 사면 음식을 많이 사 먹게 될 것 같아서요”


엄마는 번 돈은 다 집에 가져다주고 본인 삶을 살지 못하는 기덕 씨가 참 짠하다는 말을 했다. 장례식장에 다녀오고 나서도 소주 한 잔을 마시며 말을 꺼냈다. ‘걔도 너처럼 어린 나이에 아빠를 잃었잖아. 네가 생각나더라’ 비슷한 나이에 부모를 잃은, 짠한 애. 그간 기덕 씨 이야기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그러나 소주잔에 찰랑이는 술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엄마는 기덕 씨에게서 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닌데? 난 완전 괜찮은데?' 내가 나를 긍정해도, 가족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순간 나는 정말로 걱정받아 마땅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혹시 내 괜찮음이 척으로 보였을까 신경쓰이다가, 어떤 내가 진짜 나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 나 지금 안 괜찮나?' 이제껏 내가 이유 없이 너무 낙관해왔나? 기덕 씨는 직장이라도 있는데 말이지. 


혼자만의 낙관으로는 가족을 안심시킬 수 없다는 깨달음, 결국은 청년 실업자 통계에 포함될 1명이라는 명확한 현실 인식, 용돈을 주는 엄마의 속사정. 그런 것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용돈 100만 원이 하나도 좋지 않고 처참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난 아직 버틸 만한 돈도 있고 손 벌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용돈 봉투가 내 현실 감각과 위치를 일깨운다. 이제 꿈에서 돌아올 시간이라고. 


습관적으로 잔액을 확인한다. 바꾸지 못한 몇 주의 주식을 현금으로 환산한다. 무엇을 새로 하기에도, 이 삶을 이어가기에는 용기가 부족한 돈. 공모전을 찾아본다. 끼워 맞출 주제를 생각해봤다. "세 모녀" 콘셉트로 여행 공모전에 응모해볼까, 아빠가 좋아했던 음식을 팔아 한식 수필 쓰기에 도전해볼까...  누군가 나를 짠하게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장단을 맞춰줄 수 있다. 백만 원 치의 짠함을 내게서 지울 수 없다면 불행을 팔아 하루를 사는 건 어렵지 않다. 우울하게 체면을 차리는 것은 현재의 내겐 사치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용돈을 받던 순간의, 바닥이 무너지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도 아빠의 사망 보험금이거나, 아빠의 통장 잔액이거나, 부의금일 그 백만 원을 나는 절대로 쓸 수가 없다. (20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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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현재 모든 돈 탕진



매거진 소개 ⎮ 이것은 애도가 아니다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빠의 삶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같지도, 내 삶은 <애도일기>를 쓴 롤랑 바르트 같지도 않았다. 이것은 애도의 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빠가 죽은 후 진동하는 삶의 기록, 죽음과 삶에 대한 엇갈린 고찰, 남겨진 자가 삶을 처리하는 서툰 기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적절한 애도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오길 바란다. 프롤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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