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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Jan 02. 2020

결혼식과 장례식 사이

나는 한 뼘이라도 나아질까

오늘은 S가 결혼하는 날이다. 고등학교 동창인 S는 21살 때인가 걔 남자 친구와 닭갈비를 먹은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보통 이렇게 연락이 끊긴 동창은 결혼 소식도 뒤늦게 듣거나, 모바일 청첩장이 와도 가지 않는다. S를 보러 간 이유는 요즘따라 잘 챙기지 못한 관계에 후회를 느끼는 탓이었다. 아빠의 장례를 치르던 날, 동창들이 참석해 일을 많이 도와줬다. 장례 이틀 차에는 S에게 전화가 왔다. 소식 들었다고, 이런 일이 있는데 직접 못 가서 미안하다고, 임신 중이라 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아니 괜찮아 S야, 이런 일로 오랜만에 연락해서 내가 미안하고 고맙다, 너 결혼식에 빨리 가고 싶다 주절거리는 내게 S는 울면서 말했다.


너는 속이 없는 거야 아님 정말 괜찮은 거야? 지금 내 결혼식이 중요해?


아빠가 죽은 후 내가 놓치고 살아온 관계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난다. 특히 장례식장에 와준 사람들, 연락해주는 사람들은 정말 고맙다. 경사와 애사가 사람의 인생에 불러일으키는 강진에 대해 경험하고 나니, 나도 웬만하면 참석하고 싶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물론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제껏 동창과 동기 같은 제도적 관계에 집착하는 것을 기피해왔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잘 다루는 관계가 하나도 없으면서 관계의 출신 성분에 너무 예민하게 굴어왔다.


S는 그때 닭갈비집에서 만난 남자 친구 결혼을 한다. 9년을 연애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임신한 지는 5개월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드레스를 잘 골라서인지 전혀 티 나지 않았고 나보다 배가 홀쭉했다. S는 고등학교 때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 길쭉길쭉하고 말랐고, 얼굴도 고등학교 때랑 똑같았다. 오랜만에 봐도 불편하지 않고 자주 봐온 것처럼 편했다. 나는 웨딩스레스를 입은 S를 보고 왠지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겉으로는 “남편 눈빛이 S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네”라고 주제넘은 말을 할 뿐이었다.


그날 다른 여자 동창도 몇 명 마주쳤다. 졸업 이후 처음 보는 K는 두 품에 21개월 아기를 안고 있었다. 식 중에도 내 옆에 앉은 K는 끊임없이 딸을 달래며 소란을 피우지 않게 애를 쓰고 있었다. ‘천장 스팽글이 장난 아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블의 꽃잎을 잘근잘근 찢고 있는 나와 달리 K는 벌써 작은 인생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었구나. 10년 만에 만난 동창 결혼식만큼 달라진 삶의 각도를 선명히 느끼는 곳은 없다. 문득 젖꼭지를 만지면 우울해진다는 트윗이 떠올랐다. 나도 약간 그런 종류의 우울함이 들었다. 우리의 각도는 점점 더 커질 것이다. 




S의 결혼식장 홀은 족히 60개가 넘는 화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확하게 손으로 세지는 않았지만 대충 10개로 묶어 크게 헤아렸다. 나는 무심한 척하면서 화환에 적힌 단체명을 확인했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모두 경찰 공무원이라고 했다. 화환도 무슨 경찰, 무슨 대학교, 무슨 법조인, 무슨 방송사…. 나는 자연스럽게 아빠의 장례식장에 온 화환 개수를 비교했다. 8개였나. 그것도 무슨 플라자, 무슨 산악회, 아빠가 일하다 죽은 근무지. 아빠가 불쌍했다.


그래도 아빠의 친구들이 식장을 오래 지켰다. 나는 계속해서 검은 한복으로 바닥을 쓸고 다니며 자리를 옮겨 다녔다. 아빠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게 아빠가 사람들을 잘 챙겼다, 욕은 잘해도 호탕한 사람이다, 인복이 있다, 네 아빠만큼 경조사에 잘 참석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몇 명은 “집안에서는 몰라도 밖에서는 참 잘했다”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더했다. 아빠는 가장으로서는 별로였지만 밖에서는 호인이었다.


삼일장이 끝나고 부의 명단을 정리했다. 200백 명가량이 왔는데 70% 정도는 나와 엄마의 지인이었다. 아빠 핸드폰에 저장된 모든 사람에게 부고 문자를 보냈는데도 아빠의 지인은 많지 않았다. 장례식장에는 아빠가 이어주었다는 재혼한 커플 한쌍이 왔다. 그들은 이틀 내내 장례식장을 지키며 향에 불을 붙이고 울었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내게 장례가 끝나면 참석 명단을 알려달라며 전화번호를 적어갔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아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애통하다며. 누군지 확인 좀 해봐야겠다고 했다. 내가 그 얘기를 전하자 엄마는 부조금 지폐를 세면서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뤄도 정승이 죽으면 한 명도 안 온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아빠가 경조사에 잘 참석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친구들 자녀의 결혼식에도 자주 참석했겠지,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에 소주를 실컷 마시고 여느 때와 같이 목소리를 높이며 주변인들의 답답한 구석을 시원하게 긁어 줬겠지, 상주 가족이 싫어해도 친구가 좋아했다며 향 대신 담뱃불을 붙이고 백화수복 대신 소주를 올렸겠지. 경조사가 결국 인간관계를 위해 뿌린 수금의 반복이라는 걸 떠올리면 아빠가 더없이 애잔해졌다. 아빠.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나는 결혼도 안 할 거니까 이젠 기회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 가족이 죽기 전에 아빠 지인들이 먼저 죽겠죠.


S의 결혼식이 끝나고 사람들 중 몇 명은 길게 늘어선 화환의 꽃들을 몇 가지 빼서 알록달록한 꽃다발을 만들었다. 아빠 장례식의 근조화환은 뽑아갈 꽃도 없을뿐더러 장례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장례식장에 처음 모습 그대로 반납해야 했다. 장례를 마무리할 때야 삼촌이 화환을 다른 운송업체 사람에게 용돈을 받고 팔아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사무실 직원이 와서는 성질을 냈다. 화환을 파셨냐고, 그러면 첫날 말씀드린 장례 혜택이나 할인한 게 말짱 도루묵 될 수도 있다고. 나와 엄마는 삼촌 대신 사과를 했다.


결혼식과 장례식. 자녀의 결혼식은 부모를 위해 필요하고, 부모의 장례식은 자식에게나 유의미하다. 의례에 참석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관습에 대해, 그럼에도 수없이 진행되는 허례허식에 대해, 만나고 살고 죽는 삶의 굴레에 대해 무의미를 느낀다. 그러나 그 염증도 오래가지 못하고 나는 꽃들을 비교한다. 계획된 결혼과 느닷없는 장례, 축하 화환과 근조 화환을 비교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결혼할 마음이 없다는 걸 모른 채로 아빠가 떠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식이 열려서 내 화환 수를 누군가의 예식과 비교할 일이 없는 것도 다행이었다.




S의 식이 시작하기 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다섯 학번 차이가 나는 대학 선배였다. 선배는 전화를 받자마자 내 컬러링 얘기를 하며 한참 웃었다. 네가 김성재의 ‘말하자면’을 아냐며. 나는 선배가 말하는 듀스의 역사와 김성재의 죽음과 90년대의 음악과 고학번의 근황 같은 것을 끊지 못하고 듣고 있었다. 


언제 식장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선배의 전화를 끊지 않고 들은 것은 고마움 때문이었다. 장례식날, 선배는 페이스북에 올라간 부고란을 보고 밤 12시에 광주에서 차를 끌고 말없이 올라왔다. 그날 선배는 엄마를 간호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의 이야기를 했다. 비정상적으로 연명하던 이틀간의 시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후련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나 자신이 쓰레기 같아서 내뱉지 못했던 말들도 선배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날 새벽에 돌아가다가 펑크 나서 견인했잖아”라고 낄낄대는 선배의 전화를 들으며, 듀스 얘기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건 결혼식도 장례식도 듀스도 아닌, 아빠의 죽음이 다시 이어준 관계와 진동하는 삶에 대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이기적으로 고립된 내 삶이 흔들리고 새로운 의존과 자립에 대해 고민하게 된 건 내가 마주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사건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야 깨우치는 것이 민망하고 쑥스럽지만, 이런 일이라도 생겨 뭐라도 바뀌면 좋은 일이 아니겠냐고, 아무 일 없이 똑같이 사는 것보단 낫지 않겠냐고, 그렇게 최면을 걸고 침을 삼킨다.


하루 종일 정신없었을 텐데, S는 식이 끝나자마자 와줘서 고맙다는 카톡을 보낸다. 나는 “이런 건 나도 배워야 하는데..” 하면서 답장을 또 미룬다.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고 결심하고 다짐해도 집에 돌아오면 모든 의지가 사라지고 관성대로 리셋된다. 과연 나는 한 뼘이라도 나아질 수 있을까. 나는 변할 수 있을까. (2019.6)




매거진 소개 ⎮ 이것은 애도가 아니다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빠의 삶은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 같지도, 내 삶은 <애도일기>를 쓴 롤랑 바르트 같지도 않았다. 이것은 애도의 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아빠가 죽은 후 진동하는 삶의 기록, 죽음과 삶에 대한 엇갈린 고찰, 남겨진 자가 삶을 처리하는 서툰 기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에, 사실은 이 모든 과정이 적절한 애도였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가 오길 바란다. 프롤로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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