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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Aug 23. 2018

배려없는 당신의 이별법

소중한 만남, 하지만 이별도 소중했을까

아주 예전에 나는 문자로 이별을 통보받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딱 한 문장이 담긴, 문자 단 한통으로.


내가 알파고랑 사귄거면 문자통보 인정한다. 내가 상대방의 인격을 무너뜨릴 정도로 인류애가 멸종될만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였다면 통보 따위 없이 내 곁을 떠나는 경우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닌,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지냈던 사이에 디지털 문자 몇 개로 사람 사이를 정리하는 건 좀 심한 거 아니냐는 말이다.


그의 이별 문자를 봤던 순간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쳐간 기억은 스무살 때 보았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장면이였다.


주인공인 '캐리'는 아침에 일어나자 바로 어젯밤까지도 함께였던 남자친구였던 ‘버거’가 사라졌음에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그리고 버거가 놔두고 간 포스트 잇 한장으로 자신이 이별을 통보를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재활용도 안될 최고의 쓰레기였던 버거는 캐리가 만나지 않아도 되었을 남친 컬렉션 중의 한 명이였다. 이름부터 버거가 뭐냐 버거가.) 화가 난 캐리는 남자친구가 그 전날 줬던 꽃을 버리고 여자친구들과 집합해 그에 대한 욕을 신명나게 나눈다.  


당시 캐리의 하루를 지켜 봤을 땐 캐리가 하루종일 느꼈을 불 같은 감정이 잘 이해가 안갔지만 내가 이런 배려없는 상황에 처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배려없는 이별을 당하는 건 정말 이 정도로 X같은 기분이구나.’ 라는 사실을.

 


자신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 버거. 어쩌라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포스트 잇 본 순간부터 이미 밉다 못해 극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경험했던 문자 통보식 이별이 최악의 이별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대나무같이 한결같던 나의 생각을 싹둑 잘라버린 존재가 나타났다. 바로 '잠수이별'이라는 녀석이다. 최근 들어 흔히 일어나고 있는 이 잠수이별이란 건 말 그대로 헤어지자는 통보조차 하지 않은 채 사라지고 나서 모든 연락을 무시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대학 교양과목이였던 심리학 시간에 그런 걸 배운적이 있다. 슬픔의 5단계, 이른 바 사람이 슬픔을 받아들이는 데 거치는 다섯가지 단계라는 것이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배려없는 이별들은 이런 헛소리같은 단계들을 거칠 틈조차 주질 않는다. 배려없는 이별은 부정-분노-타...ㅎ...ㅕ...ㅂ이 되지 않아 다시 분노-부정-분노...의 무한 루프 상태를 선사한다. 사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에 분노와 부정의 간극이 상당히 넓어지고 타협에 도달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최근에 잠수이별을 당한 내 지인은 한동안 거의 반폐인이 되서 시간을 지냈다. 희망과 절망 그 사이에서 답도 없는 상대방만 기다리다 결국 자신이 자신에게 지쳐버리는 말도 안되는 상황. 결국 그녀는 혼자 남아 관계의 파편을 정리하고 그 고통스러운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배려없는 이별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그렇다. 당하는 당사자는 상대방이 만들어 놓은 희망고문 안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갈 수 밖에 없다.




곰곰히 지켜본 결과, 이런 배려 없는 이별을 하는 시람들은 공통의 특징들이 있었다.



1.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한다.


배려없는 이별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 자신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대책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나쁜 사람일 뿐인데도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별을 하기 전, 상대방에서 입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게 유도하기도 한다. 남들이 납득할만한 이미지를 중시하는 경향과 더불어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저 비겁한 사람일 뿐이다.



2. 자신의 안위(만)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이별이란 것은 고하는 사람에게도, 받아들여야 하는 사람에게도 큰 상실과 아픔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배려없는 이별을 하는 이들은 자신만이 상처받지 않는 이별을 추구한다. 헤어짐의 이유를 상대방의 탓으로 돌려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너의 이런 점 때문에 헤어진다.', '너의 상처받은 모습을 더 이상 보기 힘들어서 이런 결정을 내렸다.' 등의 상대방의 언행이나 마음을 탓하는 주장으로 일관한다. 이 특징이 제일 잔인한 이유는, 이별을 고하는 사람이 상처에서 벗어나는 만큼,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만큼의 상처를 더 안게 된다는 것이다. 



3. 자기 합리화에 빠져있다.


배려없이 이별하는 이들은 그 자체가 자신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든다는 걸 깨닫지 못할만큼 멍청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저 자기 합리화를 잘 하는 것일 뿐이다. 눈 앞에서 그 사람의 고통이 보이지 않으면 그게 존재하지 않은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이런 이별일지라도 한 때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믿는다. 어떤 의미에선 그들이 맞다. 하지만 최소한 솔직해져야 한다.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보다 상대방을 더 사랑하진 않았다. 애초부터 그랬으니 배려없는 이별이 가능한 것이다.






이 세상엔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조금만 상대방과의 입장을 바꿔보면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비겁하고 나쁜 짓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려없는 이별을 시전한 사람은 꼭 그 죄가 부메랑처럼 돌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벗어나고 싶어 안달난 것을 지켜보는 고통이 얼마나 사람을 속에서부터 말라 비틀어지게 만드는지, 남은 생에서 몸소 체험할 기회가 오길 간절히 바란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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