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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Aug 30. 2018

진심이 하는 거짓말

내가 네 진심을 숨긴 이유


나는 항상 사람 사이에 완벽한 진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진심은 그저 사람 나름이고,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이 세상엔 진심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대가, 반대로 진심에 너그럽고 싶을 상대가 각각 존재한다는 이유였다.


맨 처음 그를 봤을 때, 난 그의 진심이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모르게, 어쩌면 알면서 줄줄 흘리고 다니는 사람. 자신의 외모가 어느 정도 호감형인지, 어떤 방식의 매력을 지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 주위엔 항상 여자가 많았고, 그들 모두에게 항상 다정다감해 보였고, 그냥 그런 느낌의 사람.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그런 그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내 기분은 썩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그저 궁금했다. ‘그가 지금 내게 내보이는 진심이란 과연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그는 흔히들 말하는 그놈의 ‘의미부여를 할만한 행동들’을 했다. 매일 어디 갈 때마다 내가 생각나는 것을 보면 전화해서 시시콜콜 떠든다던가. 핸드크림을 실수로 많이 짜버렸다고 내게 덜어주며 손을 잡는다던가. 혼자 밥 먹는 거 싫어한단 말에 불쑥 음식들을 잔뜩 사 온다던가, 남자 친구나 할 법한 오글거리는 말은 잔뜩 해놓고 멋쩍게 웃음으로 날려버린다던가 등의.


끼 부리지 마, 나 한 개도 재미없어.

두려움이 앞섰다. 다른 이들에게도 언뜻 내비치는 그의 매너들, 내가 아니라도 다른 누구에게나 이런 행동을 할 것 같았던 그의 평소 이미지에 나는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하고 설레어 그를 짝사랑하고 있는 숱한 여자들 중의 한 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증거를 찾으며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그러다 그 끝에서 모든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만큼은 말이다.


진심을 가리는 제일 좋은 방법은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향하던 마음보다 내 옹졸한 자존심을 앞세웠다. 그렇게 나 혼자 결론짓고, 나 혼자 최소한의 상처를 감내하고, 나 혼자 다시 무뎌졌다. 얼마나 유치한 마음이었던 걸까, 그 마음은. 나는 내게 시작도 되지 않은 연애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진심과 나의 진심을 저울질했고 그 과정은 그리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에게도, 그리고 알았다면 아마 그에게도.


결국 내가 장난으로 무마시키며 흐지부지 넘겼던 관계는 어느새 시간이 지나 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 우리 사이의 왕래가 자연스레 뜸해질 때쯤, 나는 같은 공간에서 그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그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예전의 좋았던 일들을 기억하냐는 그의 질문에 '너무 예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그 시절, 그가 내게 보였던 웃음의 입모양, 그의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한 채로. 하지만 그 말과 동시에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시야에 들어온 그의 표정은 '이것 봐, 너 그때 진심 아니었잖아.' 였던 나의 생각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는 나와 수족관 놀이 따위를 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예전 일을 이야기하며 오히려 내게 진지한 자세로 사과했다. 끝내 우리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관계의 형태를 유지하고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했었다고. 내가 생각하던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상처를 받았음에도 그걸 인정하기 싫어 끝내 자신의 진심을 가볍게 포장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그는 그런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린 서로의 진심에서 나온 거짓말을 굳게 믿고 있었을 뿐이기에. 오히려 같잖은 저울질로 그를 폄하하고 그의 진심을 완벽하지 않게 만든 건 나였다. 그가 그의 상처를 숨겨왔던 것만큼 나는 내 판단도 숨겼어야 했던 것이다.



이 세상엔 믿어야만 보이는 마음이 있다.

진심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내 생각은 아직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턴 어떤 형태의 진심이든 정정당당히 마주하기로 했다. 물론 이 세상엔 믿음을 저버리는 마음 또한 분명 존재한다. 그런 진심은, 어떤 진심보다 더 악하고 진짜 같기도 해서 다른 진심들을 깎아내리고 상처 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진심이란 건 애초에 보이지 않는 무형 무취의 존재다. 믿지 않으면 절대 다가갈 수 없고 그곳에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러니 이젠 상대방의 진심을 따지는 못난 마음은 잠시 내려두고, 나의 진심을 먼저 들여다보고 싶다. 상대방의 진심이 어떤 형태이든 내 진심이 쉽지 않았으면, 내 부족하고 못난 진심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젠 그걸로 되었으니 말이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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