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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May 26. 2020

나약한 마음에 죄책감을 심어주지 말았으면

누가 버티는 것이 해결책이라 그랬습니까


도망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몰라요.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눈초리를
견뎌내는 것,
그런 부수적인 결과물을
감수하는 것도 선택의 일부잖아요.


최근, 후배가 한 명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했다. 그것도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던 후배였기에, 내 속엔 잠시 "나 때문인가?"라는 혼란스러움이 번졌다. 조심스럽게 자초지종을 묻자 그는 최근 겪은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는 회사생활에 대해 극심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듯했다. 취준생 시절 저리 가라의 극심한 업무량도 그렇지만, 평소 부장님에게 매일 혼나며 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이제 글을 쓰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이젠 글 때문에 혼날까 봐 무섭기만 하다고 말했다.


그러다 계기가 온 것은 출근하던 어느 날이었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하늘이 핑 돌며 눈 앞이 까맣게 보였다고 한다. 결국 잠시 내려서 벤치에 앉아 쉬었다가 다시 출근을 했지만, 일 자체에 대한 극심한 피로감과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고 마치 증언을 하듯 덤덤히 말했다. 아니, 증언이라기엔 너무 참혹했다. 가끔 아침에 눈을 뜨면, 차라리 자신이 교통사고라도 나서 회사를 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말이다.


너무나 작은 세상의, 작은 회사.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작은 세상에 그만 속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너무 두려웠단다. 그 이유는 사실 나 또한 너무나 잘 아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만둔다 말하면 그 사실을 꼬투리 잡아 열정 없는 사람으로 몰아세우거나, 어떻게 몇 개월도 안되어서 회사에서 도망가냐는 둥의 험담을 시작한 동료들의 반응 탓이었다. 그들에게 그만둔다는 것은 결국 버티지 못했다는 것이고, 버티지 못한다는 것은 약해 빠졌다는 식의 논리였다.


"다들 이 정도는 참고 살아"라는 말이 그들에겐 진리이자 바이블이었고, 그 말을 숭배하던 시절에 태어났던 태어나지 않았던, 우리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말들을 퍼올렸다.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도 모르는, 이 암묵적으로 기정화 된 사실들을 가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분위기를 쌓아갔으니 그 친구가 어떻게 사고의 회로를 돌렸을진 뻔하다. 사람들이 안 보이는 사이에서 얼마나 자신의 나약함을 씻어내려 애썼을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못한다는 사실보다도 칼날 같은 시선이 두려워 스트레스 받는 과정 속에서 그의 마음이 얼마나 부서졌을지 안 봐도 비디오인 셈이었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하기 싫어 나의 과거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놓진 않았으나, 그래도 최소한 그에게 위로는 해주고 싶었던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너 주위의 동료들처럼 생각하진 않는다고. 너 주위에 보이는 소수의 사람들 이외에도 너의 선택이 어떻든 존중하고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회사 사람들이야 그저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일 뿐 그 사람들의 세상에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회사라는 울타리를 넘으면 어차피 남이니 그냥 시선에 개의치 말고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


신입에게 좋은 말만 해주려는 허울 좋은 소리가 아니냐고 따져 묻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오히려 나는 이 답변이 누구나 할 수 있는 답변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은 신입이었던 적이 있었고, 그래서 소위 말하는 '존버'를 해봤는데 그것이 인생을 평탄하게 굴러가게 하는 방법당연 아니라는 사실쯤은 진작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한 번쯤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버틴다는 것은 긍정적이고 열정 가득한 행위가 아니며, 그저 존재하는 문제를 외면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혹독하게 겪었을 것이다. "첫 회사인데 왜 이렇게 힘들까. 모든 회사들은 다 이런 걸까"라고 말하며 대표님 욕을 찰지게 지껄이거나, 증오하는 첫 사수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한 밤도 숱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과정을 겪고 난 후에 "다들 이러고 살아"라고 말할 수 있는 멘탈이 난 더욱 이해 안 갈 뿐이다. 왜 자신도 느낀 아픔을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씻어내려 애쓰는 건지. 과거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건 잘은 모르겠지만 건강한 방향은 아니다.


그러기에 나는(정말, 진짜 정말 후배가 그만두는 일이 다신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다시 그런 일이 생겨 누군가가 나에게 상담을 하러 온다면 해 줄 말은 딱 한 가지밖에 없다.


마음에 대한 죄책감까지 심어주지 않을게.

자신이 판단했을 때, 이 길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 찾으면 그만이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거나 집안일이 있다거나, 사고로 인해 크게 다쳤다던가, 일을 당장 그만둬야 할 드라마틱한 이유가 있지 않다 해도 자신이 일을 그만두고 싶은 의지가 있으면 거기서 끝이다. 이 세상에 일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충분히 있고 그것을 따른다면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감 놔라 배 놔라 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이건 경력 직장인으로서 일을 해봤어서 "이건 누구나 다 참고 버티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일을 해봤어서 "그래 힘들 수 있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미래의 어느 순간 내가 현시대를 앞장서지 못하는 꼰대 오브 꼰대가 된다고 하더라도, 점만큼은 잊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그래야 누군가에겐 회사가 숨 막힌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원하지도 않는 가치에 갇혀 불행해지는 누군가의 인생에게 출구를 만들어주는, 최소한의 배려를 건넬 수 있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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