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차가 꽤 차신 전/현직 승무원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면 크루즈승무원의 출국날은 어딘가 지쳐 보이는 인상, 부스스한 용모와 함께 무거운 케리어를 바리바리 싸들고 용을 쓰는 모습을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공항에 도착해 꼬박 밤을 새워 비행기를 타고, 또 갈아타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겨우 머나먼 땅에 발을 디딜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2015년, 첫 승선을 앞두고 내가 받은 비행기표의 목적지는 아시아의 야경 맛집 중 하나인 '홍콩'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계약에서 역시 나는 홍콩행 비행기 표를 손에 쥐게 되었다. 스타 크루즈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사인만큼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겠다. 그렇다면 세 번째는 어느 행 비행기표였을까?
미국 마이애미, 샌프란시스코, 플로리다, 포트 에버글레이즈부터 영국 사우스햄턴, 스페인 바르셀로나, 스웨덴 헬싱키, 네덜란드 로테르담, 사우스 아프리카 케이프 타운, 호주 시드니 등 전 세계의 유명 항구 도시들을 꼽으라면 아마 이런 도시들을 떠올리겠다. 하지만 적어도 4년이라는 시간동안 이러한 수식어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멀었다.
카니발 담당자와 면접 당일 합격통보를 받은 우리는 감사하게도 승선에 관한 상세정보까지 알 수 있었다. 이미 두 번의 홍콩행 비행기표를 받은 경험이 있다 보니 '다음에는 어느 행 비행기표를 받게 될까?'에 온 신경이 곤두섰었다.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이 쓰인 네모 칸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오른쪽으로 밀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홍콩'
응?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야 이건 운명의 장난일 거야 했지만 눈을 껌뻑이고 뚫어져라 보아도 이 작은 네모칸에는 'Hong Kong'이라고 적혀있는 게 아닌가. 여전히 부풀어있던 내 기대 끝자락을 한껏 움켜 잡아 보았지만 헛웃음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변에서 면접 결과를 당일 통보받은 것만 해도 어디냐며 좋게 좋게 생각하라는 말에 내 고개는 자동적으로 끄덕여졌다. 그렇지만 두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연속으로 같은 행 비행기표를 받은 그때의 내 심정을 감히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말 이기적이었던 걸까? 짧은 순간 스스로가 안쓰러우면서도 미웠다.
그렇게 세 번 연속으로 홍콩행 비행기표를 받게 된 나는 다음 계약과 함께 비행기 표에 대한 궁금증이 나날이 늘어갔다. 이번엔 어디로 가게 될까? 간다면 아주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어라는 생각은 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이어 두 번 연속으로 아시아 크루즈를 배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비행기표 역시 가까운 나라인 일본의 나가사키, 그리고 나리타 공항이었다.
남들은 어쩜 처음부터 그리 쉽게들 먼 곳으로 가는지,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허나 이것 또한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마음을 추스르도록 했다. 그러다 마침내 2019년 여름, 비행기표를 확인한 내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시애틀
보고도 믿을 수 없었지만 이것은 분명 'Seattle'이 목적지인 비행기 티켓이었다. 세상에나, 내가 미국을 가게 되다니!
너무 신이 난 나머지 모니터에다 대고 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쳐댔다. 이게 그렇게 신날 일인가? 유난 떤다며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 동안 크루즈를 타면서도 밟아보지 못한 땅에 대한 미련이 해소되는 그 순간은 상당한 희열을 안겨다 주었다.
고용계약서에 새겨진 'Star Princess'라는 선박명은 시애틀 이상으로 나를 설레게 해 주었는데, 그 이유는 스타 프린세스호가 하와이와 멕시코 크루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심지어 그곳으로 향하기 전 미서부의 여러 도시를 기항하게 될 거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비록 알래스카 크루즈가 컨트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한다.
승선을 위해 널브러진 여름 옷가지들을 케리어에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이 옷들과 함께 따가운 햇볕 아래 카메라를 향해 브이를 그릴 지구 반대편의 내 모습을 어렴풋이 그려보다 이내 웃음이 터져버렸다.
인천공항에서 15시간을 날아 시애틀에 도착한 나는 포트 에이전트 직원의 도움 아래 공항 근처의 힐튼 호텔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라 일본에서처럼 주변 탐방의 즐거움은 잠시 접어두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시간에 맞춰 로비로 내려오니 이미 사인온 크루 멤버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나는 서둘러 조식을 먹고 그들과 함께 포트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갱웨이로 향하는 순간까지 주변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탄은 끊이질 않았다. 창밖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이국적인 풍경과 건축물들은 실로 아름다웠고 엄격하게 진행되는 미국의 보안 절차는 왠지모를 긴장되는 순간들을 자아냈다.
선박의 크기와 내부 구조 모두 익숙하기만 한 스타 프린세스호였지만 나를 마중 나온 슈퍼바이저가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