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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블 May 03. 2021

계절을 기억해

내가 계절을 기억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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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봄, 나는 벚꽃이 한창이던 날 퇴사했다. 그 당시 다니던 회사엔 동백나무, 목련 나무, 벚나무가 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몇 차례 불고 나면 동백꽃이 피기 시작했다. 반질반질한 나뭇잎 사이사이로 조그만 동백꽃 봉오리가 올라오고 며칠 후면 그 색이 붉어졌다. 그걸 잊고 지낸 어느 날 무심히 고개를 돌리면 꽃잎이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렇게 붉은 동백꽃이 피고 지고를 반복하다 보면 겨울의 끝이 보였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목련이었다. 회사 계단을 오르내리며 목련 나무를 살피곤 했다. 꽃봉오리를 감싼 털 껍질이 벗겨지면서 새하얀 꽃이 드러났다. 꽃은 시간마다 피어나기 시작했다. 가래떡을 튀겨 놓은 것 같은 하얀 목련 꽃잎이 피기 시작하면 나란히 서 있던 벚나무에도 봄의 기운이 퍼져가기 시작했다.     



퇴사를 앞둔 나는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회사 창문 건너로 보이는 봄을 한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시간, 이 모습이 마지막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출근 날, 벚꽃이 만개했다. 목련 나무엔 작은 연두색 잎이 달렸고, 벚나무는 꽃잎에 한가득 감싸여 있었다. 그날 나는 사람들과 어떤 말을 나누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계단을 오르며 먼지 쌓인 창문 너머로 보이던 벚나무의 모습이 전부다. 그해 봄은 그렇게 내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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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엔 늦은 저녁이면 동네 친구를 만나곤 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장마 기간이었다. 공기 중에는 비릿한 비 냄새가 떠다녔고,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쉬이 식지 못해 바람 속을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한 저녁이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사는 친구와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반팔 티에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밖으로 나갔다. 장우산을 손에 쥐고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하며 걸었다. 만나기로 한 가게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여름밤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열어놓은 문 사이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왔다. 일주일에 두어 번씩 만나던 그 친구와는 할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차가운 맥주는 테이블 위에서 식어갔고, 우리의 수다는 지칠 줄 몰랐다. 가게 문을 나서 골목으로 들어서야 웅성거리던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사이 우리의 목소리는 쉬어버렸고, 그게 우스워 깔깔대며 손을 흔들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종종 그해 여름을 생각한다. 이젠 전화로 “밖에서 기다릴게. 얼른 나와.”라고 할 수 없는 거리에 사는 친구. 그 여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추억은 오래 남아 여름이 오면 늦은 밤 골목에 울리던 타박타박 우리의 발소리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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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좋아하는 나는 가을바람이 불어오면서부터 설레기 시작한다. 뜨거웠던 여름 공기에 호흡을 느리게 쉬다 시원한 바람에 참았던 호흡을 터뜨린다. 그 가을, 그 사람도 가을처럼 내게 왔다. 시원한 바람 덕분에 자주 웃던 그해, 그 사람이 보낸 문자에도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그해 가을, 우리 만날 때마다 함께 걸었다. 나뭇잎은 바닥으로 떨어져 폭신한 카펫을 만들어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짧은 머리와 뿔테 안경, 하얗고 긴 손가락, 웃으면 살짝 휘어지는 눈매. 옆에 있어도 훔쳐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계수나무 잎에서 나던 달큼한 솜사탕 냄새처럼 그에 대한 기억도 내게 달큼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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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끝나면 어김없이 겨울이 왔다. 겨울에 태어난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다. 몇 겹의 옷을 껴입어도 그 사이로 파고드는 겨울바람은 뾰족한 바늘 같았다. 고향인 경상도가 아닌 충청도에서 맞이한 겨울은 지금까지의 겨울과 다르게 느껴졌다.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지만,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눈이 내리면서 세상은 느린 재생 버튼이 눌러진 것처럼 천천히 흘렀다. 오도카니 앉아 그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지난겨울엔 눈 예보가 있던 날마다 창이 큰 카페로 갔다. 몇 시간이고 그렇게 눈을 보곤 했다. 밤사이 눈이 내린 날엔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눈을 밟으며 골목을 누볐다. 눈 밟는 소리도, 신발이 눈에 푹푹 잠기는 느낌도 좋았다.     




나는 이렇게 때마다 계절을 느끼는 게 좋았다. 생명이 자라나는 봄의 흙냄새, 아스팔트 바닥 위로 투둑 투둑 떨어지는 빗소리, 건조한 가을날 마른 낙엽을 밟으며 나는 바스락 소리, 세상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 눈 오는 날의 풍경 같은 것들.

오늘 아침, 지구온난화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최근 우리나라 계절 일수를 따져보니 여름은 20일이나 길어졌고, 겨울은 22일이나 짧아졌다고 한다. 점점 사계절을 기억할 수 있는 날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았다. 부지런히 계절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계절은 연필로 스케치된 일상에 다채로운 색을 칠하는 일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색이 나의 하루에 각자만의 색을 더해준다. 인화된 사진을 앨범에 간직하듯, 나만의 글로 이렇듯 계절을 기억하고 싶었다.






- 사진출처(언스플래쉬 https://unsplas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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