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주워온 아버지

by 조서정 시인


엄마는 내 시의 토양이었다. 나는 그저 엄마가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다 보니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엄마는 어려서부터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셨다. 어린 시절엔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그저 옛날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한 번은 정민 교수가 쓴「한시 미학 산책」이란 책에서 보물처럼 발견되기도 했었다.


나는 자라면서 화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엄마는 마을 이장 일에 새마을지도자까지 도맡아 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농사일을 혼자 전부 감당하면서 틈틈이 산에서 약초를 캐다 다듬고 찌고 말리고를 반복하며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내셨다.


그러다 보니 손톱이 자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러 손톱이나 발톱을 자르지 않아도 됐다. 아버지는 본래 귀하게 태어난 분이라서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답지 않게 일을 할 줄 몰랐다. 아버지가 잘하는 일은 남의 집 등기 서류나 편지 대필, 탄원서 작성, 보증 등과 같은 집안 경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들을 하셨다.



청수기도 삼년 만에 세상에 나오셨다는 아버지
어느 별에서 떠돌다가
시골 아낙의 간절한 기도에 헛발 디뎌
세속으로 낙화한 하늘의 아들이었나?
온 누리에 사랑과 친절을 베푸시니
항상 주머니를 가벼이 여기셨다
그러다가도 문득 문득
고향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는지
집 안 깊숙이 숨겨둔 인감도장을 찾아내어
은총을 베푸사 보증을 구걸하는 사람들을 위해
밀린 11조를 한꺼번에 헌납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로다
불규칙적인 11일조를 바친 나이롱 신자 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재산을 몽땅 들어 받치고 귀향길에 오르시니
이 땅에 남겨진 자식들에게
싸움의 불씨가 될 유산 대신 빚만 남기신지라
사모제 치르고 상속포기 각서부터 서둘러 작성하니
홀로 남은 엄마에 대한 효성으로
온누리에 평화와 우애가 가득하였다 하더니라


-졸시 「위대한 유산」 전문/ 시집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까>에서



평생 한량으로 사신 아버지가 느지막이 노인요양병원에 취업이 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서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셨다. 그러면서 화려한 말발과 착한 천성을 자본으로 같이 근무하던 요양보호사 아주머니들과도 친절하게 지내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외박을 하고 다음 날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하필 마침 애들 아빠랑 친정에 간 날이었다.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밤 자루를 털썩 토방에 내려놓으셨다. 엄마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를 평소처럼 대하셨다. 혼자 겸연쩍었던 아버지는 괜스레 핑계를 늘어놓았다.


“저기 매기 가서 밤새 밤을 줍느라 이제 왔어”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도 엄마는 아무런 반응을 안 하셨다. 그걸 보고 있던 애들 아빠가 한 마디 거들었다.


“아이고! 장인어른이 새 장모님 댁에 다녀오셨나 봐요”


사위가 능청을 떨어대도 엄마는 못 들은 척 저녁을 짓고 밥상을 차렸다. 보통의 집안에서 이런 일이 있었으면 아주 한 바탕 난리가 나고도 남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평정심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엄마가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외박 사건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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