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분의 '엄마'

by 조서정 시인

제비집


고향집 처마 밑에 제비집 한 채 있었다 삼십 촉 전구를 뒷간으로 쓰던 녀석들 작대기를 내려치는 순간, 문밖으로 튀어나온 할머니의 고함소리가 내 머리채를 낚아챘다 몇 년 후 돌아가신 할머니의 품에서 나온 편지엔 독일에 광부로 간 젊은 작은아버지가 불구의 몸으로 앉아 있었다 고향 떠날 때 남긴 머리카락 한 줌과 빛바랜 주민등록증 한 장도 나란히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계절이 바뀔 때마다 까치발 딛고 선 할머니가 제비를 기다린 것은 활처럼 휜 등을 펼쳐 제비집에 무명 솜과 지푸라기 넣어주었던 것은, 이십오 년 동안 소식 한 장 없는 아들, 빛바랜 주민등록증 하나로 기다리다 먼 길 떠나던 그날, 그리운 아들 모습 눈부처로 새겨가느라 차마 감지 못하고 가신 길


제비집은 할머니와 작은아버지가 일 년에 한 번 만나던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면회소였다


-시집<모서리를 접다> 중에서



며칠 전 우연히 가수 이미자 씨의 특별감사 콘서트를 보게 됐다. 1959년에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미자 씨는 콘서트에서 대한민국을 지켜준 숨은 영웅들에게 감사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대한민국은 꿈도 희망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며 “그 힘든 삶 속에 제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은 한 분 한분께 감사드린다”는 인사를 했다.


본래 TV 프로를 작정하고 보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됐는데 나도 모르게 채널을 고정하게 됐다. 그 이유는 콘서트 중간에 나온 파독 광부 이야기와 간호사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화장지 한 통을 다 쓸 정도로 눈물을 찍어냈다. 영화 국제시장 내용까지 마음에서 클로즈업돼서 더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영화 국제시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바로 우리 집안 이야기였다. 본래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아버지 형제 3남 1녀 중에 가장 큰 아들로 귀하게 자란 아버지와 막내 고모를 제외한 두 분의 작은아버지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한 둘째 작은아버지는 결국 국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채 다시 독일에 파독 광부로 나가셨다.


그렇게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독일에 파독 광부로 나간 둘째 작은 아버지는 워낙이 감성적인 데다 예술 감각이 뛰어나서 나름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그래서 정부의 장발 단속에도 머리 깎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계속 피해 다니다가 결국 독일에 나가면서 머리칼을 잘라 할머니한테 드리고 갔을 정도다.


그렇게 독일에 간 작은 아버지는 결국 귀국을 포기하고 독일에서 아내를 얻어 독일에 정착했다. 간간이 인편에 소식을 전하거나 가족들 선물을 사 보냈던 기억이 내 유년의 추억 속에 남아 있다. 작은아버지한테서 온 선물을 받고 답장을 쓴다고 밤새 몽당연필을 깎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루 처마 밑 30촉 전구에 제비 부부가 집을 져 놓고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채 열 살이 안됐던 내 눈에는 제비 때문에 전구가 너무 더러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거기다가 마루에 앉아 있으면 제비 똥이 머리 위에 떨어지는 날도 있었다.


매일매일 제비들이 먹이를 물고 들락거리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던 내가 하루는 작정하고 작대기로 제비집을 깨끗이 철거했다. 어린 내가 힘들게 제비집을 다 철거하고 어른들한테 칭찬받을 생각에 뿌듯해하고 있던 찰라에 할머니한테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할머니한테 된통 혼난 나는 억울한 마음에 저녁밥을 굶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쓸쓸히 울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가 샘에서 미끄러져서 팔뚝이 부러지는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이때다 싶었는지 나한테 쏴 붙이기 시작했다.


“니 년이 제비집을 부셔가지고 니 에미 팔이 부러진겨

그것이 얼마나 신령한 것인디 쯔쯔쯔 몹쓸 것 같으니라구“


제비집 한 번 잘못 부쉈다가 그 이후로 한 1년여 동안을 할머니한테 시달렸다. 이유인즉은 내가 제비집을 부셔서 집안에 우환이 끓는다는 것. 그도 그럴것이 타국에 나가 있는 아들의 안위를 위해 늘 살얼음판 위를 걷듯 조심조심 살았던 할머니는 무슨 날만되면 가난한 살림에도 꼬박꼬박 장독대위에 떡시루를 올려놓고 천지신명께 치성기도를 드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제비집을 부순 것에 대해 할머니가 그토록 예민했던 것은 동티라도 나서 독일 작은아버지 신상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싶은 걱정이 앞섰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제비 부부가 먹이를 물어다 새끼 입에 넣어주는 것을 보면서 몇십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삭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가 평생 둘째 아들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뒤에 할머니의 유품 속에서 독일 작은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머리카락 한 줌과 주민등록증 한장이 발견됐다. 할머니가 둘째 아들이 두고 간 물건을 손수건에 곱게 싸서 항상 가슴에 지니고 사셨다는 것을 돌아가신 이후에 알게 됐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몇 년 뒤에 고국 떠난지 30여년 만에 독일 작은아버지가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까지 독일 작은아버지는 할머니가 아직 살아 계신 걸로 알고 있었다.


그도그럴것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독일에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괜히 나오지도 못하는 동생 마음 아프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결국 공항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작은아버지는 자기가 불효자식이라며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런저런 우리 집안의 사연 때문에 이미자 특별 감사 콘서트 내내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베트남전 파병과 파독 광부들은 6.25 이후 폐허뿐이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일으켜 세운 주인공들이다. 지금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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