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이디 Jan 21. 2024

산책에 관한 동상이몽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해."


남편은 오늘도 점심을 먹고나서 산책을 나갔다. 남편의 산책코스는 아마도 아파트 담벼락 어디쯤에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동네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돌아오는 것일게다. 나가면서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하라는 얘기는 내 커피를 한잔 사다주겠다는 의미이다.


사실 나는 약속없이 커피숍에 혼자 앉아있는 걸 잘 못한다. 게다가 커피를 사마시는게 너무 아까워서 커피숍에 잘 가지 않는다. 집에서 직접 내려마시는 커피가 더 맛있고 돈도 덜 드는데 왜 굳이 커피숍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는지 이해가 안된다. 하지만 남편은 나와 너무 다르다. 언젠가 커피값도 비싼데 왜 커피숍에 가서 마시냐고 했더니 남편은 자신의 취미생활이니 참견하지 말라며 정색을 한 적이 있었다.


커피 한잔에 4500원 정도이고 하루에 한잔씩 사먹으면 한달이면 135000원이나 된다. 남편은 커피값을 계산하는 나를 쪼잔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의 그런 취미생활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그의 산책이 달갑지 않고 내 커피를 사다주는 것도 별로 고맙지 않다. 아니 이쯤에서 솔직해져야 같다. 남편의 산책이 달갑지 않은 이유는 혼자서 나가기 때문이다.


나는 애초에 결혼생활에 대한 로망이 크게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당연히 직장에 들어가듯이 결혼은 자연스러운 그 다음 순서였기에 마침 내 옆에 있던 그와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다. 오히려 결혼에 대한 로망은 결혼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면서부터 생겨났다. 이렇게 살고 싶어서 이런 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과 살아보니 나는 이렇게 살고 싶은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결혼전에 우연히 보았던, 손을 꼭 잡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노부부의 뒷모습이 내가 가지고 있던 결혼생활의 유일한 로망이었다. 그들 사이로 비추던 석양빛이 너무 따뜻하고 아름답게 느껴져 나의 노년도 그런 모습이었으면 하고 바랐었다.


남편은 이런 나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어한다. 그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결혼생활에 대한 로망이다. 내가 방해하지만 않으면 그의 로망은 얼마든지 실현가능하다. 아니 이미 충분히 실현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협조가 없으면 실현될 수 없는 나의 로망은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얻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는 남편은 나와 함께 하는 산책을 불편해한다. 더군다나 손을 잡고 걷는건 말할 것도 없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이생에서는 텄다!


산책을 나갔던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TV 리모컨을 누른다. 다음 순서는 쇼파위에 누워서 낮잠을 잘 것이다. 역시나... 한쪽이라도 로망을 실현했으니 우리 결혼도 절반의 성공은 거둔 셈인가.







이전 04화 로또아들의 셀프(self) 효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