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청운효자동
종종 익숙한 것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에는 ‘걷기’가 그랬다. 걷기. 다리를 움직여 바닥에서 발을 번갈아 떼어 옮기는 행위. 의식하지 않고 움직였던 다리인데 새삼스레 내가 걷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걷는다는 것은 따져보면 사실 꽤 복잡한 행위다. 한쪽 발을 내디딜 때 다른 쪽 발은 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그리고는 넘어지기 전에 내디딘 발의 발꿈치가 땅에 닿고 몸의 무게중심은 앞으로 이동한다. 다시 이번에는 내디딘 발에 체중이 실리면서 몸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한 걸음 걸을 때 수많은 근육세포들은 미세하게 움직이며 균형을 잡는다.
어쩐지 따지고 볼수록 걷는다는 게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만큼 우리는 누군가 걸을 때마다 박수를 치며 칭찬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이미 큰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부모님께서는 아직도 가끔 내가 처음 걸을 때 이야기를 하신다.
“꼭 거짓말 같았어.”
내가 처음 걷기 시작한 날은 공교롭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나는 내가 하필이면 그 날 걸었다는 사실이 기쁘다.
걷기가 대단한 건 걷기에 걷는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걸음으로써 얻어지는 수많은 것들이 걷기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그 의미는 가지각색이겠지만 유명인 중에 걷기 예찬론자가 많은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서점가에는 걷기를 예찬하는 여러 책들이 나와 있다. 걷기의 효능을 과학적으로 밝히며 걷기가 뇌를 자극하고 장운동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졌다.
나는 걷기의 효능 중 하나가 이동함으로써 내 눈앞의 풍경을 바꾼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걸음으로써 방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세상을 마주 할 수 있다. 내가 속한 풍경이 바뀌면 신기하게도 막혀 있던 생각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자극은 새로운 사유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익숙한 공간을 걸을 때도 해당되는 말이다. 하지만 만약 걷는 장소가 낯선 곳, 새로운 곳이라면 그 감각은 더욱 극대화된다.
내가 종로구 청운효자동을 순전히 ‘걷기’ 위해 찾았던 이유도 비슷했다. 매일매일 똑같은 장소, 똑같은 메뉴, 똑같은 PD 지망생 생활에 나는 지쳐 있었다. 새로운 경험과 자극이 없으니 글을 쓰고 기획안을 쓰는 재료도 동이 난 듯했다. 자극이 필요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카카오TV의 <밤을 걷는 밤>(이하 밤걷밤)이었다.
'내가 혹시 승산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몸은 청운효자동을 걷고 있었지만 내 머리는 매일같이 걷던 지겨운 곳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지독했다. 생각해봤자 별 답도 안 나오는 고민들. 여기까지 와서 나를 괴롭히다니. 하지만 영원히 여행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시간이 지나면 현실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여행지와 현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30분쯤 걷자 나는 무무대(無無帶)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넋을 놓았다.
아무것도 없구나 오직 아름다운 것만 있을 뿐
막혔던 생각도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무엇을 보기 위해 걷고 있을까? 다른 사람들이 걸으면서 보는 풍경은 어떤 걸까? 나는 수많은 고민을 짊어지고 현실의 의미를 찾으려 집착했다. 하지만 의미를 찾는 일은 압도적인 풍경 앞에서는 별일 아닌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는 누구도 내가 걸을 때 칭찬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걸으면서 마주하는 풍경은 오직 나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이라도 내가 걸을 때마다 박수라도 쳐주어야겠다. 내가 걷는다는 건 사실 거짓말처럼 대단한 일이라는 걸 나만은 알고 있다. 어딘가를 걷고 있는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