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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Mar 19. 2023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 톨스토이의 『고백록』 -

  그런 날이 있다. 토요일 아침, 약속은 없지만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백팩을 하고 집을 나선다. 현관 밖을 나서는 순간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난감한 상황. 가방 안에는 다행히도 책 한 두 권이 들어 있는데. 카페에 가서 책을 읽을까. 어디를 갈까. 무엇을 할까.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소소하지만, 사실은 근본적인 방법의 한 예시다.     


  낯선 외국의 어느 도시로 여행을 떠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단순하게 대답을 할 수 있어 좋다. 내가 생각하는 거라곤 고작 오늘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고 뭐를 먹을까, 이 세 가지에 국한되니 말이다. 그러나 토요일 아침, 마땅한 일정 없이 한 두 권의 책이 들어 있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선 나는 실존적 고민에 빠진다. 친구를 만날까, 좀 걸을까,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그래 놓고선 선택지는 대개 카페다. 나를 반기는 아메리카노 한 잔에 위로받으며 책장을 펼친다. 그 안에서 마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철학은 크게 두 갈래로 발전해왔다. 하나는 이 세상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 실존에 대한 물음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은 대개 세상의 구성요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는데, 밀레투스 학파의 창시자인 탈레스의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말은 널리 회자되어 왔다. 그 외,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학파, 헤라클레이토스, 파르메니데스, 앰페도클레스 등이 저마다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의견을 피력했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면 그 철학적 주장들은 참 공허하게 들린다. 과학의 진보는 ‘What’에 대한 사고체계를 바꾸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How’는 어떠한가.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천착해오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고 지금도 찾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삶이 공리적 해석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철학적 사족은 필요 없을지 모른다. 어떻게 사느냐는 물음은 그래서 치명적인 킬러문제이다. 그것도 분명하게 똑 떨어지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는. 여기 톨스토이는 이 문제에 도전장을 던진다.     


  『톨스토이 고백록』은 그의 불세출의 저작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를 대단한 업적으로 여기지 않을 만큼 삶의 목적이나 방향성에 대한 정신적 의미를 겪은 다음에 쓴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말년의 명작 『이반 일리치의 죽음』, 『부활』과 그 결을 같이한다. 방종과 타락, 부르조아의 삶을 회개하고 단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여 내놓은 답은 결국 신앙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기존 종교적 믿음은 아니다. 그는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그의 책들은 판금되고 끝내 정교회로부터 파문당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종교적인 내용이 아니다. 외려 종교를 넘어서는 고뇌가 엿보인다.     


  사회가 정해준 인생스케줄에 따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풍족하고 부유한 가정생활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삶이 정지된 것처럼 느꼈고 ‘인생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과 책들이 내게 가져다준 명성에 대해 생각할 때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 좋다. 네가 고골리나 푸쉬킨이나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 아니 이 세상의 모든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라고 하자.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그리고 나는 이런 의문들에 대해 그 어떤 대답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의문들은 미룰 수 없는 것이었고 당장 대답되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이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습니다.
  내가 그 동안 발을 딛고 서 있던 토대가 밑으로 꺼져서 없어져 버려서 내 발 밑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이 느껴졌습니다. 내가 그동안 의지해서 살아왔던 모든 토대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나의 삶은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잠잘 수는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 삶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 원하는 어떤 것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이루든 못 이루든 그 결과는 무의미할 것임을 나는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랬다. 대문호도 삶에 대해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안도감이 들었다. 내가 가진 고민을 톨스토이도 어찌하지 못하고 궁극적 불안에 내몰렸다. 생각하니 묘한 쾌감과 숙명 같은 동질감이라는 감정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인생이라는 숙제 앞에 함께 어린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책 속으로 더 빠져들었다, 그가 찾은 답을 빨리 읽고 싶어졌다.     


  그는 학문에서 인생의 목적과 방향성에 대한 답을 구해보기로 했다. 크게 수학으로 대표되는 실험학문과 형이상이 정점인 추상학문으로 나누어 질문을 던져 보았다. 실험학문은 분명하고 정확한 답을 내놓기는 하지만 인생에 대한 질문을 인정하지 않았고 추상학문은 의문은 인정하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톨스토이는 먼저 산 현인들로부터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들로부터 무엇을 배웠을까. 안타깝게도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되다는 것. 산다는 것은 곧 고통이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허무주의의 극치다.     


소크라테스: 육신의 삶은 악이고 거짓이다. 따라서 육신의 삶의 사멸은 복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갈망해야 한다.
쇼펜하우어: 삶이라는 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따라서 악이다. 무로 전환되는 것만이 삶에서 유일하게 신성한 것이다.
솔로몬: 우매함이든 지혜이든, 부유함이든 가난함이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허망하고 공허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이 얼마나 하무한 일인가?
석가모니: 고통과 병과 노쇠함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삶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톨스토이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방향을 돌려 보기로 한다. 그 사람들의 삶을 분석하고 그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정리해보는 것이다. 그의 분류를 따라가다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더 생각해봐도 그 외에는 없을 것 같다. 그가 분류한 4가지 삶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허무와 인생의 무상함으로부터 벗어나는 첫 번째 삶의 방법은 ‘무지’다. 무지라는 것은 삶의 부조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그냥 하루하루 허투루 대충 살아가며 육체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혹시 생각이 나더라도 금방 잊을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 부류의 사람들이 제일 행복할지도 모른다. 모르고 사는 게 때론 약이다. 지인이 내게 말한다. ‘인문고전 너무 읽지 마. 삶이 허무해져.’ 그가 옳다는 생각도 해본다. 독서는 방향을 잡아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장 난 내비게이션 같으니 말이다. 톨스토이는 동양의 옛 우화를 소개하며 욕망으로 그때 그때의 위기를 무시하고 넘겨버리는 무지한 삶을 애처롭게 바라본다.     


  나그네는 맹수를 피해서 물이 없는 마른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우물 바닥에서 그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용을 보았습니다. 이 억세게 운 없는 사람은 맹수에게 찢겨 죽을까봐 우물 위로 기어서 올라올 수도 없고, 용에게 잡혀 먹힐까봐 우물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없어서, 우물 중간의 틈새에서 자라난 나무의 가지를 붙잡고서 거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에서는 점점 힘이 빠져나가서, 얼마 안 있어서 그는 우물 위와 아래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맹수나 용에게 꼼짝없이 죽게 될 것임을 직감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있는 힘을 다해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검은 쥐와 흰 쥐가 나타나서, 그가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를 갉아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나뭇가지가 뚝 하고 부러질 것이고, 그는 용의 쩍 벌린 입속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었습니다. 나그네는 자기가 죽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가지에 달린 잎사귀들에 꿀이 몇 방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는 혀를 내밀어 그 꿀을 핥아 먹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쾌락주의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정의한다.     


  쾌락주의라는 것은 삶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용이나 쥐들을 애써 외면하고서 우리가 현재 누릴 수 있는 즐거움들을 가능한 한 최대한도로 누리고, 우리 눈앞의 잎사귀에 잔뜩 묻어 있는 꿀을 최대한 맛있게 핥아 먹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식욕과 성욕으로 대표되는 쾌락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사람을 만나 먹고 마시고 떠들거나 이국의 여행지로 떠나 즐거움에 도취되거나 넷플릭스 드라마를 정주행하거나 섹스 중독에 빠지거나 담배와 커피를 세트로 영접하는 것 등, 이 모든 게 쾌락과 관련을 맺는다. 그렇다면 정신적 쾌락은 어떤가, 책에 빠져드는 것. 그것도 겨우 쾌락에 불과한가. 좌절감이 몰려온다. 내가 카페에 가서 책 읽는 행위가 겨우 쾌락을 위해서일까.     


  세 번째 방법은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부조리한 습관을 단번에 끝내버리는 자살을 의미한다. 아무나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고 아주 소수만이 실행한다. 톨스토이 사후 3년 후에 태어난 알베르 카뮈에게 이 방법은 너무나 어리석게 들렸을지 모르겠다. 삶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호소와 열망에 대한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으로부터 발생되는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은 굴러떨어진 바위를 다시 정상으로 묵묵히 끌어올리는 시시포스같은 반항이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자살하거나 종교로 도피하는 것은 그에게는 치욕적이다. 부조리한 운명에 대항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이유이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의미가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 방법은 약함이다.      


  약함으로 인한 방법이라는 것은 사람이 삶은 약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앍고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에 매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학자들이나 사상가들. 소위 철학적 사유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부류다. 그러고 보면 정신적 쾌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서를 통해 삶의 심오한 그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사람들도 이 범주 안에 들 수도 있겠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아마 두 번째와 네 번째인 것 같다. 두 번째 방법에 몰입되면 네 번째를 잊고 살아가는 게 문제지만,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니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톨스토이는 결국 신앙에서 답을 구했다. 책 속에서 인생의 답을 찾으려다 결국 수녀가 된 지인이 떠오른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에 무한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신앙밖에 없다는 그의 논리는 이렇다.     


  신앙은 인간의 삶에 의미에 대한 지식이고, 그 지식의 결과로 인간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은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반드시 무엇인가를 믿어야 합니다.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유한한 것의 허구성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유한한 것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한한 것의 허구성을 깨달은 사람들은 무한한 것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인간은 신앙이 없이는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더군다나 그의 신앙이 기존의 교조적인 종교에 대한 무조건적 편입이 아니라 삶의 쾌락을 멀리하고 경건하고 겸손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소박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삶처럼 원시종교의 색채가 나서 좋다. 그의 신앙이 마음에 든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특정 종교에 귀의하지는 않을 것 같다. 불가지론자에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믿음으로의 도약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여전히 내 마음 속에는 사르트르와 카뮈가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막연한 불안으로 자살했다던데 그의 불안도 나의 불안과 같은 것이었을까. 이 삶을 이렇게 끝낼 정도로 나는 염세주의자는 아니다. 세상이 답을 주지 않으면 때로는 그냥 무시하며 살기로 한다. 시험 상황에서 풀지 못하는 문제가 항상 존재하듯이, 인생의 킬러문항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점진적으로 반항하는 것. 그러다보면 좀 더 따스한 날들이 오겠지.          


  얼마 전에 앙리 마티스 전시회에 다녀왔다. 그림들 배경 벽면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나는 항상 내 노력을 숨기려고 노력했고, 사람들이 내가 작품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결코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내 작품이 봄날의 가벼운 기쁨을 가지고 있기를 바랬다.”    

 

  나도 내 삶이 봄날의 가벼운 기쁨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ps.

에밀리 에스파하니 스미스는 『어떻게 나답게 살 것인가(원제: The power of meaning)』에서 삶을 의미 있게 지탱하게 해주는 4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다른 사람들과 긍정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유대감을 느끼는 것(유대감), 시간을 쏟을 가치 있는 일을 찾는 것(목적),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스토리텔링), 자기 상실이라는 신비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초월)이 그것이다. 생각해보면 결국 삶은 곧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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