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회사를 고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회사 위치였다. 볼거리가 많아 유동인구가 많고, 여러 회사가 모여 있어 일하는 느낌이 팍팍 드는 활기찬 상업지구여야 했다. 그리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뭔가 '느낌'이 좋은 곳이어야 했다.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한 후 이직을 준비할 때, 한 회사에서 좋은 조건의 연봉과 포지션으로 제안이 와 면접을 보고 합격한 적이 있었다. 회사와 업무 자체만 생각하면 괜찮은 기회였지만, 조용한 동네에 우두커니 위치한 회사 위치가, 면접을 보러 회사를 찾아 걸었던 그 동네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면접에 합격했지만,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결국 최종 오퍼를 고사하고 말았다. 이런 나의 결정을 두고 당시 내 남자친구였던 남편은 내 결정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 회사에 출근하는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한 번씩 사주 앱이나 사주집에 가서 재미 반, 진심 반으로 사주팔자를 보면 나에게 토(土)의 기운이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 건지 몰라도 나는 자연환경이나 장소가 주는 기운에 예민한 편이다.
결혼 후엔 뜸해졌지만,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엔 날씨 좋은 주말이면 함께 경기도의 곳곳을 무작위로 드라이브하곤 했다. 특정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경기도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교차로가 나오면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핸들을 돌리며 운전을 하는 것이다. 랜덤 드라이브이긴 했지만, 어떤 날은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방향으로 향하다가 익숙한 동네에 닿기도 했고, 때론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곳에 도착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연히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면 한적한 길에 차를 세우고 자연을 만끽하거나, 근처의 맛집을 찾아 식사를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주중에 사람들에게 치여 쌓였던 스트레스가 씻겨나가고, 새로운 한 주를 살아갈 에너지를 얻곤 했다.
그날은 꽃샘추위가 끝난 어느 화창한 봄날의 주말이었다. 간만의 따뜻한 날씨에 우리는 랜덤 드라이브를 떠났다. 갈림길이 나오면 "이번엔 좌회전!", "다음은 우회전!" 하며 무작정 길을 따라 달리기를 한 시간, 어느새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좁은 시골길 양옆으로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넓게 펼쳐진 밭 너머로 마을을 감싸는 초록빛 산이 평온한 풍경을 자아냈다. 창문을 활짝 열자 봄바람을 타고 상쾌한 풀 내음이 느껴졌다. 띄엄띄엄 자리한 집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마을 깊숙이 들어갔다.
"... 근데 자기야, 여기 분위기 좀 그렇지 않아?"
"그래?"
그런데 마을 깊숙이 들어갈수록, 처음엔 따뜻하고 평화롭게 보였던 풍경과 달리 마을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이상하게 묘했다. 딱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산과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어두운 느낌이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었다.
예전에 지리산에 갔다가 근처의 어느 마을을 지나간 적이 있다. 마을 어귀마다 돌탑과 장승, 솟대가 서 있었고 무당의 집이 여러 채 보이던 인상적인 곳이었다. 창밖으로 마을의 풍경을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선명한 어떤 묘한 기운을 느꼈다. 고요하지만 낯설고,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번엔 그때와는 또 달랐다. 좀 더 서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따라 마을 끝자락까지 갔다가,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는 곳에서 차를 돌렸다. 우리는 어쩐지 유쾌하지 않은 기분에 더 이상 그 마을에 머무르지 않고 차를 돌려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그 마을에 대해 검색하다가 그곳이 사이비 종교가 여럿 모여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고 소름이 돋았다. 사람에겐 정말 오감을 뛰어넘는 어떤 기운이 있나 보다.
나는 서울의 청담, 종로,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각자 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라 모두 애정하는 동네이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종로가 참 좋았다. 처음 지하철을 타고 간 곳이 광화문 교보문고였고, 10대 시절부터 친구들이나 남자친구와 함께 종로의 북촌, 삼청동, 덕수궁 돌담길, 피아노 거리, 명동, 청계천 등을 자주 찾았다. 그래서 종로는 내게 제2의 고향처럼 느껴진다.
혼자 점심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종로는 여유롭고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는 곳이었다. 회사 건물을 나서면 명동과 청계천 주변에서 여행을 즐기는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고, 걷기 좋은 날이면 시청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 근처에서 샌드위치를 사들곤 시립미술관 앞 그늘진 벤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날에는 시립미술관에서 잠깐 작품을 둘러보다가 사무실로 돌아가곤 했다. 꽃이 만개하거나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계절이 되면, 20대 시절 내가 그랬듯이, 친구들과 이곳을 찾은 앳된 친구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는 것도 소소한 행복이었다.
좀 전에 외출을 하니, 느껴지는 공기에 제법 봄기운이 묻어난다. 지루했던 추위도 이제 끝나가다 보다. 곧 벚꽃이 피는 계절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종로의 창경궁 벚꽃길을 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