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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에서, 달을 외치다

by 회사원Q Mar 2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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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밤하늘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에서 가장 붐비는 장소는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앞이다. 고흐만큼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으며 소비되는 예술가가 또 있을까.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었던 '스스로 귀를 잘랐다'는 비극적인 일화, 돈 맥클린(Don McLean)의 노래 '빈센트'에서 'Staryy, starry night"만 들어도 느껴지는 애잔함. 그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단순한 이미지가 아닌, 비극적인 예술가의 삶이 투영된 입체적인 이야기로 다가간다.


 나는 <별이 빛나는 밤>의 밤하늘을 가득 채운 다채로운 푸른빛, 달과 별에서 번져 나오는 따뜻한 노란빛, 그리고 이를 감싸는 소용돌이치는 붓터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소용돌이는 그가 유난히 사랑했던 별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했지만 끝내 닿을 수 없었던 깊은 좌절과 불안이었을까? 스스로 요양원에 들어간 뒤, 창밖 풍경에 상상력을 더해 완성했다는 이 그림. 괴로움을 껴안은 몰입으로, 찬란한 밤하늘을 그렸을 그의 심정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고흐 옆에는 루소가 있습니다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고흐의 작품 바로 옆에는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가 걸려 있었다. 모두가 <별이 빛나는 밤>을 사진 찍느라 분주한 사이,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 작품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느 자리에서건, 그것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소외된 대상을 눈여겨보게 된다. 과거의 경험이 내게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에는 달이 뜬 사막에서 악기와 항아리를 곁에 둔 채 잠든 집시 여인과,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듯한 사자가 있다. 모름지기 사람을 공격하는 게 맹수의 본능이거늘, 사자의 모습이 마치 주인을 섬기는 충견 같기도 하다. 이 어색한 조합에 고개를 갸웃하게 될 작품이지만, 은은하고 깨끗한 색감으로 표현한 고요한 밤의 분위기 때문인지, 정작 관객의 눈을 쉬이 사로잡지는 못했다. 게다가 바로 옆에는 강렬한 색감과 거친 붓터치로 소용돌이치는 <별이 빛나는 밤>이 자리하고 있다. 비운의 자리를 차지한 이 작품은, 잘나가는 퀸카를 친구로 둔 하이틴 영화 속 비련의 소녀처럼, 당최 눈길이 가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품 크기는 고흐의 것보다 2배나 크다. 루소에게 과몰입하다 보니 괜시리 모마의 큐레이션이 너무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혹시 나처럼 예술에 문외한이거나, 모마에서 고흐의 작품만 보고 지나친 이들을 위해 앙리 루소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는 파리 세관원으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린 뚝심 있는 인물이었다. 루소는 기존 회화에서 강조하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단순하고 평면적인 화풍을 고수했는데, 이로 인해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다"는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이 독특한 화풍은 현실과 상상이 교차하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후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는 선구자로 인정받게 된다.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했으나, 살아생전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후대에 재조명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고흐와 공통점을 갖는다. 공무원으로 일했으니 고흐만큼 궁핍하지는 않았지만,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우울증과 정신적 결핍에 시달렸던 고흐와 달리 꽤 낙천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낙천적인 삶을 가능케 한 그의 유한 성격은 <잠자는 집시>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평온하기까지 보이는 이 작품을 조금만 시간을 들여 살펴보면 <별이 빛나는 밤에> 못지않게 고독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사막 한가운데서, 손에 나무 지팡이를 쥔 채로 이른바 '떡실신'한 집시의 얼굴은 참 지쳐 보인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연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항아리를 들고 음식을 구걸하는 나그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옆의 그녀만 한 크기의 사자가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은, 먹잇감이라기보다 오히려 인간을 연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늘에 진심과 정성이 닿아, 인간을 살려둔 어느 전래동화의 호랑이처럼, 루소는 자신도 언젠가 예술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사자에게 담아낸 것은 아닐까.  


이상의 별, 희망의 달

 고흐와 루소 모두 밤하늘을 소재로 했지만, 밤하늘을 통해 드러낸 그들의 표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고흐가 사랑했던 별은 대게 '영원'을 상징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빛나기에 숭고하며 이상적이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내면의 고통을 겪는 고흐에게, 저 하늘 위의 별은 닿고 싶은 구원자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밤하늘은, 달보다는'별'이 빛나는 공간이었고, 영원한 이상을 좇던 그는 짧은 생을 마감하고 그렇게 별이 되었다.


 반면, 달은 '변화'를 상징한다. 차오르고 기울며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간다. 커다란 보름달이 되면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지만, 초승달이 되면, 별보다도 희미한 빛을 낸다. 별처럼 늘 반짝반짝 빛나지도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희미한 달은 다시 차오를 것이라는 믿음을 준다. 영원한 빛은 아니지만, 다시 떠오를 수 있다는 긍정을 품고 있기도 하다.

 루소의 그림 속 집시 여인이 비록 고단해 보일지라도 비극적이지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녀를 비추는 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사자의 눈동자가 달을 닮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하늘이지만, 달이 있기에 그 어둠이 두렵지만은 않다.


문 文 Moon

 고흐에게 밤하늘은 이상적인 별이 있는 영원과도 같았고, 루소에게 밤하늘은 변화하는 달을 품은 희망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밤하늘은 무엇일까.


 내게 밤하늘은 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이었다. 나답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지친 내 마음을 달랬던 시간. 차마 내치지 못하고 바보같이 받아들이고야 만 타인의 시선과 말들을 열심히 닦아내던 시간. 발끝까지 차갑게 저려오는 비수를 떼어내지 못해 때때로 서럽게 울었던 시간. 숱한 결심과 망설임이 교차하던 시간. 그래도 가장 나답게 울고 결심하고 망설이고 사이사이 웃었던 시간.


 내 이름 석 자 중 하나인 '문(文)'. 해외에서는 내 이름을 ‘Moon’이라 소개하곤 한다. 나에게 달은 모든 걸 뚜렷하게 드러내게 하는 태양과 다르게, 나를 나답게 만들고 나다운 상상을 하게 만드는 희망이다. 희망은 모양은 늘 달랐다. 갈피를 잡지 못해서 방황하기도 하고 환한 보름달처럼 잔뜩 부풀기도 했다. 하지만 모양이야 아무렴 어때, 희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달을 보려고 베란다에 가보니 달이 보이지 않는다. 나도 고흐처럼, 내 마음의 달을 간직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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