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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an 23. 2023

설날 곰팡이 떡국 사건

당신은 알지 못 하는 명절 주방 비화

요즘은 명절이면 연휴를 이용하여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아직도 조선의 며느리답게 어제 시댁에 도착하여 아침에 차례를 지냈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의 시어머니라서, 손수 음식을 준비하는 대신 검증된 반찬가게에 일괄 주문하여 차례상과 손님상을 차려 낼 음식을 준비해 두셨다.


우리가 직접 요리하기로 계획한 유일한 음식은 떡국이었다. 음식에 진심인 어머니는 멸치와 표고버섯 우린 물에 한우 사태까지 넣어 푹 끓여 국물을 준비하고, 고기는 따로 건져 식힌 후 찢어서 양념에 무치라고 하셨다. 계란은 노른자 흰자 분리하려 지단을 부치고, 김도 구워서 잘게 부수었다.


이제 떡을 넣어  끓이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를 마치자, 어머니가 떡국떡을 한 보따리 들고 나오셨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뽀얗고 탐스러워야 할 떡은 파랗고 까맣고 붉은 곰팡이로 얼룩덜룩했다. 자세히 보니 흰 곰팡이도 피었다. 나는 시계부터 확인했다. 10:27 PM. 마트도 문을 닫을 시간이었고, 이웃집에 도움을 요청하기에도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태연하기만 하셨다. 그냥 씻어서 먹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곰팡이 핀 부분은 잘라내고 잘 씻어서 떡국을 끓이면 아무 상관없다고… 나는 “곰팡이 핀 떡국떡 먹어도 되나요?”라고 구글 검색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꾹 참았다. "안 돼요. 큰일 나요." 하는 검색 결과가 나와도 달리 떡을 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산더미같이 떡을 쌓아놓고 하나하나 이리저리 돌려 보며 곰팡이를 찾아 잘라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떡을 손질하셨다. 나도 이미 노안이 와서 눈이 침침한데, 팔순 노인에다가 당뇨로 황반변성까지 온 어머니의 눈에 곰팡이가 다 적발될지 걱정이었다. 나는 어머님이 놓친 곰팡이는 없는지 매의 눈으로 체크하며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떡을 손질하는 동안 어머니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시다가 625 때 전쟁 중에 학교 다닌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부산에서 자란 어머니는 피난민들과 군인들을 위해 집의 일부를 내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학교에는 피난 온 또래들도 나왔는데 하루이틀 나오다가 말없이 사라지곤 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 짝꿍은 수시로 바뀌었더란다.


“너는 625 때 어디 있었니?”

어머니가 물으셨다. 어머니가 그때 초등 2학년이었는데, 어머니의 아들과 동갑인 며느리가 625 때 어디 있었겠는가?


“어머니,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죠~ 어머니가 아홉 살 열 살이던 시절인데요.”

어머니는 아, 그렇지! 하고 금방 인정하셨다. 80대로 접어들면 노인분들의 인지 능력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며칠 전에도 병원에서 인지 검사를 하고 오신 터여서, 잠시 가슴이 철렁했는데 바로 실수를 알아채셔서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떡 손질이 끝나갈 무렵 딸아이가 주방에 나타났다. 엄마와 할머니가 뭘 하시는가 호기심 초롱초롱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일단은 비밀!이라는 말로 딸아이를 돌려보내고 나중에 사정을 설명했다. 떡이 한 주먹 정도 남았을 땐 아버님도 나타나셨다. 나는 잘라낸 곰팡이들을 바구니로 덮었다. 아버님은 의심 없이 물 한 잔 드시고 주무시러 가셨다.


아침이 밝아오자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떡국을 끓여 차례상에 올렸다. 차례상을 물리고 나서 식구들도 모두 떡국을 먹었다. 그런데, 딸아이가 떡국을 거의 먹지 않고 그대로 남겼다. 나중에 물어보니 짐작대로 떡에 곰팡이가 잔뜩 핀 것을 봐서 도저히 넘어가지 않더라고 했다. 평소에 곰팡이가 핀 음식은 먹지 않도록 가르쳤기 때문이다. 빵이든 떡이든 곰팡이가 조금만 보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모두 오염된 것으로 치고 버렸다. 그렇게 배운 아이에게 곰팡이 핀 떡으로 끓인 떡국을 억지로 먹으라 할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떡국 곰팡이가 화제에 올랐다. 나도 어린 시절에 곰팡이 핀 떡을 씻어서 끓여 먹으면 된다고 들은 기억은 있다.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한 살림에 형제가 많아 떡국떡에 곰팡이가 필 정도로 오래 보관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언니 오빠들이 장성해 집을 떠난 후 한 번 정도 분홍 곰팡이가 핀 떡을 씻어서 먹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반면 남편은 상대적으로 유복한 집에 외동이로 자랐는데도 곰팡이가 보이면 잘라내고 남은 부분을 아무렇지 않게 먹으려 든다. 이번에도 남편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전쟁을 겪으며 자란 부모님 세대는 음식을 극도로 귀하게 여기신다. 음식을 버리는 일은 죄짓는 일이고, 남은 음식은 모두 잘 보관했다가 드신다. 오늘 아침 떡국도 일 인분이 채 되지 않을 만큼 남았는데, 버릴 수 없다며 어머님이 통에 담아두셨다. 점심에 새 밥을 해서 먹을 때 내가 그 남은 떡국도 같이 먹었다. 내가 안 먹으면 어머니 몫이 되니 먹고 오는 게 낫다. 이래서 내가 조선의 며느리다.


반면 우리의 자녀 세대는 음식 귀한 줄 모른다. 포켓몬 빵을 사면 빵은 버리고 포켓몬 카드만 챙긴다는 뉴스의 주인공이 이 아이들이다. 오염된 음식은 당연히 먹지 않고, 멀쩡한 음식이라도 입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콩 한쪽이라도 나눠 먹으라는 말은 '누구나 배가 고프다'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요즘 아이들은 음식을 먹을 때 굳이 옆 사람과 나눠 먹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먹을 것이 풍족하고, 배 고픈 설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에게 배워서 음식을 권하는 경우는 있더라도 윗세대만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행동은 아닌 것 같다.

  

낀 세대인 나는 이럴 때 주로 검색을 활용한다. 어제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검색 본능을 자제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결국 구글에게 물었다. "곰팡이 핀 떡국떡 먹어도 되나요?" 검색 결과는 크게 두 부류였다. 우선은 긍정적인 경험담. "씻어서 떡국 끓여 먹어 봤는데, 아무 일 없었다." "시장에 가져가서 뻥튀기로 만들어 먹었다. 씻지 않아도 다시 뽀얀 색이 되고 맛만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주 드물게는 그렇게 먹고 배탈 났다는 사람이 있지만, 경험담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반대로 과학적인 사실에 기반한 뉴스 기사와 전문가 의견 등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곰팡이균은 가열해도 파괴되지 않으며 몸에 누적되어 여러 가지 염증 반응을 일으킨다. 암을 유발할 수도 있고 뇌에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다." "빵이나 떡에 곰팡이가 피면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우선은 딸이 그 떡국을 먹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남편은 부모님께 전화 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내가 말렸다. 우리가 말씀 드린다고 그 떡을 버리실 분들이 아니다. 괜히 우리한테 미안하게만 만드느니 말을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아무도 배탈은 나지 않았다.


조상님께도 죄송했다. 고작 일 년에 한 번 올리는 떡국인데, 곰팡이 핀 떡으로 끓인 떡국이라니...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조상님 시절에(적어도 우리 부모님보다는 더 연배가 있으실 터) 곰팡이 좀 피었다고 떡을 버렸을 리 없으니 그다지 노여워하실 일도 아니다 싶다. 더구나 조상님께만 그 떡국을 드린 게 아니라, 나 자신도 두 그릇이나 (정확히는 한 그릇 반) 먹었으니 아주 몹쓸 후손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혹시라도 설날 차례를 지낸다면 그때는 절대 곰팡이 떡국을 올리지 않을 것이다. 다 내가 곰팡이 핀 음식은 버리라고 가르친 덕분이다.


이미지출처: https://m.10000recipe.com/recipe/6949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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